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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7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Veterem Injuriam Ferendo, Invitas Novam (모욕을 묵묵히 참아 넘기면 새로운 모욕이 찾아온다)

격언들 중에는 서로 부딪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어떤 쪽을 택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모욕을 묵묵히 참아 넘기면, 새로운 모욕이 찾아온다”(By bearing with an ancient injury you invite a new one)는 격언입니다. 한국 속담에서는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반대로 말하기도 합니다. “침묵이 금이다”(Silence is golden)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에라스뮈스”의 아다지아(Adagia)에는 “침묵은 수치다”(Turpe silere)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 “말을 걸어오면 반드시 말하고, 부르면 오라”(Ad consilium ne accesseris, antequam voceris)는 격언도 있습니다. 입을 다물어야 할지 아니면 열어야 할지 헷갈릴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삭이는 것을 겸양지덕(謙讓之德)으로 여겨 왔습니다. 사소한 모욕이나 손해는 관대하게 웃어넘기는 것을 그 사람의 됨됨이나 그릇의 크기로 간주해 왔습니다.

또, 옛 속담에 “때린 놈은 다릴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릴 뻗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린 사람은 언제 보복을 당할지 몰라서 불안하게 잠을 못 이루지만, 맞은 사람은 더 이상 당할 것이 없기 때문에 두 다리를 펴고 깊은 잠을 잘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인내심과 참을성을 강조해 왔는지를 알 수 있는 격언이지만, 과연 지금도 그 말이 유효한지 의문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약자들의 인권과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미국 사회에서는 “침묵”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자기도피 내지는 무기력한 정당화로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언제고 내 마음을 알아 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조용히 모욕이나 억울함을 감내한다면, 그 사람은 머지않아 똑같은 어려움을 반복해서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소위 “왕따”라는 “따돌림 문화”가 학교의 학생들 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군대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단체 안에서 조차 알게 모르게 깊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저항해야 할 순간에 “침묵”해 버린 결과가 쌓이고 쌓여서 빗어낸 구조적인 폭력이 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침묵”을 훌륭한 인품의 덕목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인의 정신적인 수양을 위해서는 내면의 세계에 침잠(沈潛)할 것을 권하기도 했지만, 사회 생활 속에서는 침묵하기 보다는 대화의 광장, “아고라”(Agora)로 나와서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이나 권리를 주장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부당하고 억울한 것에 대해서는 참지 말고, 외치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물론,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는 품격이 떨어지고 생각이 유치한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며 갑론을박하는 것을 이렇게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당나귀가 뒷발로 찼다고 해서 똑같이 당나귀를 발로 차고 앙갚음을 한다면, 그 사람은 당나귀와 똑같은 사람일 것이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이런 질문을 하셔서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개와 달리기를 하는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요?” 정답은 “개 같은 사람”입니다. 이어서, “그러면, 개와 달리기를 해서 지는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요?” 답은 “개 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개를 이기는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요?” 이 질문의 대답은 “개 보다 더한 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의도는 개 같은 존재와는 상종(相從)도 하지도 말고, 그냥 피하라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에는 참지 말고, 몽둥이를 들고서라도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똑같은 억울한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가만히 보면, 늘 당하는 사람이 역시 또 당합니다. 이제는 자신의 억울함이나 부당함에 대해서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고 심판하실 것이라”는 애매한 말로 피해가지 말고 당당하게 말해야 합니다. 또,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무시해버리거나, 귀를 닫아버리면, 결국 다음 번에는 당신이 똑같은 일의 희생자가 될 것입니다. 이탈리아 속담에 “자기 스스로를 양으로 만드는 사람은 곧 늑대에게 잡아 먹힐 것이다”라는 말이 있고, 프랑스에는 “당신이 양이 되는 순간, 늑대가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표독스럽게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살 필요는 없지만, 부당하거나 참담한 일 앞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넘어가면, 그 불편한 시간이 한번 지나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현되고, 심지어는 더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언제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털고 일어나서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던 탐험가가 밤에 천막을 치고 잠을 청하는데, 천막 밖에 있던 낙타가 사막의 극심한 일교차 때문에 추위에 떨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애원했다고 합니다. “주인님, 제가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혹시 제 “코”만 천막 안에 넣으면 안될까요?” 하루 종일 자기를 태우고 피곤하게 걸었던 낙타를 생각해보니 갑자기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주인은 흔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낙타는 잠시 후, 다시 주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주인님,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제 “머리”만 천막 안에 넣으면 안될까요?” 주인은 그것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낙타는 다시 또 다른 청을 했습니다. “제가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목까지 다 집어넣으면 안될까요?” 그것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요청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어깨 까지만”, “상반신 만” 그리고 마침내, 낙타의 몸 전체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낙타는 주인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천막이 너무 좁은 것 같으니, 주인님이 밖에 나가서 주무시지요.” 언제라도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빼앗기는 일들이 반복될 것입니다.

많은 동물학자들은 아프리카 정글이나 밀림에서 홀로 길을 가다가 사자나 호랑이 그리고 곰과 같은 무서운 맹수를 만나게 되면, 절대로 등(back)을 보이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오히려, 몸을 부풀려서 정면으로 맹수를 응시하며 소리를 지르고 저항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한번 속고 넘어가면, 계속 속아야만 하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독사는 독사일 뿐입니다. 불필요한 관대함이나, 도에 넘는 관용을 베푼다고 독사가 굼벵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독사는 계속해서 물고 독을 뿜을 뿐입니다. 최근 최고의 베스트 셀러로 팔리고 있는 책이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책입니다. 필명이 “세이노”(Sayno)라는 사람이 지은 책인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읽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서 무료로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게 만들었고, 종이 책으로 만든 것도 결코 7천원을 넘지 않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주요 강조점은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서, 무조건 따라갈 것이 아니라,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세이 노”(Say No)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제발, “귀”가 있고, “머리”가 있는 사람은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