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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1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Exiguum Malum, Ingens Bonum (불행은 엄청난 행운이다)

고대 로마사람들은 식사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달걀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유독 샐러드를 좋아했던 로마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다채로운 채소들을 잘 섞어서 즐겨 먹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화덕에서 갓 구워 낸 빵인 “포카치아”(Focaccia)를 먹었습니다.

훗날, 이 빵은 피짜(pizza)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저녁에는 포카치아 대신에 여러 종류의 고기 음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매 식사때마다 마지막 후식으로는 어김없이 사과를 한 개씩 먹었다고 합니다. 분명한 식사법이 로마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유럽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규칙적인 식습관과 식사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저녁 시간에는 온 가족이 다 함께 모여서 공동식사를 했는데, 보통 두 세 시간 이상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 전통은 오늘 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습니다. 긴 시간 동안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하루의 일과를 말하기도 하고, 고민거리나 앞으로의 계획을 편안하게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바쁘고, 기분이 언짢아도 가능하면 함께 나누는 저녁 식사를 건너 뛰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럽의 음식점들도 거의 똑같습니다. 미국이나 한국 손님들처럼, 순식 간에 저녁식사를 끝내고 빨리 자리를 뜨는 일이 없습니다. 좋은 음식점일수록 이 식사 예법이 분명합니다. 놀랍게도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와서 아무런 대화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면서 밥을 후딱 해치우고 음식점을 나가게 되면, 옆에 앉아 있던 유럽사람들은 대번에 그의 국적을 알아 맞춘다고 합니다. “미국의 상놈들” 아니면 “아시아에서 온 한국의 미개인들”일 거라고 말한답니다. 우리같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은 과연 뭐라고 말할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저녁시간에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양복 정장을 하거나, 편한 복장을 해도 결코 가볍게 입지 않습니다. 음식점 측에서도 저녁 손님들을 그렇게 많이 받지 않습니다. 대부분 이른 저녁시간 때,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이 음식점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 자리를 지킵니다. 만약 중간에 가족들과 함께 빨리 일어나기라도 하면, 주인이 와서 “혹시,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음식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테이블에서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상당히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처음 달걀을 먹을 때부터 마지막 사과를 먹을 때까지 식사의 모든 과정을 천천히 음미하고 즐깁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Ab ovo usque ad mala”(달걀에서 사과까지) 입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 한국의 대표적인 큰 호텔에서 총 주방장(Head Chef)으로 일하시던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인생을 “풀 코스로 나누는 식사”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식사를 하다 보면, 와사비나 청양고추 같은 매운 것을 씹기도 하고, 쑥이나 씀바귀 같은 쓴 음식을 먹기도 하고, 반대로, 물엿이나 감미로운 식재료가 들어간 달콤한 음식을 먹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음식이 되었던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잘 먹어야 건강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인데, 짜고, 맵고, 쓰고, 시린 맛을 경험하게 될 때는 그 맛이 갖는 깊은 의미를 되새겨 보고, 반대로, 구수하고, 달콤하고, 단백하고, 감칠맛 나고, 그리고 기름진 맛이 나는 좋은 일을 겪을 때는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때 풍성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불행도 행복한 인생을 요리하는데 충분한 밑거름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은 칼을 든 목사였습니다.

일본 “에도 막부 시대” 말기에 “곤사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괜찮은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돼지도 입맛을 잃을 만큼’ 못생긴 추남(醜男) 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늦은 나이에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대로 같은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예쁘고 다소곳했습니다. 게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해서 곤사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 잡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얼굴이 못생긴 곤사이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 얼굴 뜯어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곤사이를 볼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차갑게 대했습니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점점 깊어 졌고, 어느 날, 아내는 매정하게 그를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습니다. 낙심한 곤사이는 고향을 떠나 “에도”(도쿄)로 올라가서 밤낮으로 학문에만 매진했습니다. 모든 시름을 다 잊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곤사이는 머지않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일본을 대표하는 한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곤사이의 집 거실 중앙에는 초상화 한 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의 신분이라면 얼마든지 더 화려하고 좋은 그림을 걸 수 있었을텐데, 언제나 변함없이 중년의 한 여성 그림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관료 중의 한 사람이 곤사이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초상화 속의 인물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곤사이는 헛웃음을 지으며 지난 날의 힘든 이야기를 말해주었습니다. “저 초상화 속의 여인은 내 아내라네. 내가 못 생겼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나를 사람 취급하지도 않고,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난 차가운 여잘세. 내 인생의 가장 큰 절망을 준 여자라네. 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도 시골에서 보잘 것 없는 촌장으로 지내고 있었을 것이라네. 내가 지금 이렇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다 저 여인의 덕분이라네.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저렇게 초상화에 담아 기억을 하는 것이라네.” 엄청난 불행을 행운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던 곤사이의 지혜가 빛나는 이야기입니다.

16세기의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는 누구보다도 불행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네덜란드 노트르담에서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인 아버지와 외과의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의 인생은 언제나 중간 지점이었습니다. 성직자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니었습니다. 가톨릭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버지가 신부였기 때문에 가톨릭을 등질 수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종교개혁자들을 지지하면서도 깊이 가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자들 양측으로부터 동시에 비난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가 인문주의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에라스무스의 역할은 더욱 더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학문적인 배경이 되어 주었고, 가톨릭 교회가 거듭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는 대 학자였습니다. 불행은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의 인생에 닥쳐오는 음식들 중의 하나입니다. 불행이나 불운이 없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선용하느냐에 따라서 불행은 언제나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 그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