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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7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하나님께 부요한 자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어떤 부자가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다가 황혼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재산이 참 많았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두고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돈이 참 많습니다. 수조 억 원이 넘습니다. 그걸 그냥 두고 가려니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재산의 반을 당신께 떼어 드릴 터이니 저 좀 더 살게 해주십시오!”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재산 전부를 나에게 준다고 했으면, 내가 너에게 2천 년을 더 살 수 있게 해 주었을 텐데, 너의 재산의 절반만 준다고 하니 나도 2천 년을 반으로 잘라서, 네가 천 년을 더 살도록 해 주마!” 부자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천 년을 더 살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그는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자가 안타깝게도 그다음 날 “심장마비”로 죽고 만 것입니다. 부자는 하나님 앞에 가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지키셔야지요. 천 년을 약속하시고 제 재산의 절반을 가져가신 분이 어떻게 단 하루 만에 저를 하늘나라로 부르실 수 있습니까? 이건 사기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 부자에게 성경 말씀 <베드로후서 3:8절>을 읽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것을 잊지 마라.” 누군가 웃자고 만든 이야기이겠지만, 돈과 생명에 대한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인생을 다르게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인생의 심각한 문제들, 즉 질병이나 장애 그리고 자신이 풀 수 없는 큰 고민을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나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또, 교활하게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사람이 나와서 예수님께 “자신의 형에게 명령해 주셔서 자기와 유산을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모의 유산을 분할하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탐욕이 가득한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이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니 탐심을 물리치라고 훈계하신 후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한 비유의 말씀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어떤 한 부자가 있었는데, 어느 해에 밭농사 풍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된 것이겠습니까? 분명히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수많은 품꾼들의 수고와 노력이 함께 해서 이룬 결과물일 것입니다. 당시에는 - 당연한 일이겠지만 - 남 밑에서 일하는 품꾼, 소작농인들이 대부분 극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가족들과 함께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도 쉽지 않던 때였습니다. 자신에게 풍년의 큰 기쁨이 주어졌다면, 부자는 마땅히 자신의 몫 이외의 수확물들을 하나님이 자기 휘하에 있는 품꾼들을 위해 허락하신 지분이라고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곳간을 허물고, 좀 더 크게 지어서 모든 수확물들을 싹쓸이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부자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독백했습니다. “내 영혼아, 이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을 만큼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히 쉬고, 먹고, 마시면서 한번 멋지게 놀아보자!” 탐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이 부자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 밖에는 관심이 없는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곳간에 들인 수확물들은 혼자서 다 먹을 수 없습니다. 머지않아 곧 벌레가 생기고 썩기 시작할 것입니다. 내게 허락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자는 비록 “버릴지언정” 남에게는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 부자의 탐욕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자기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이 부자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하시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오늘 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 부자의 영혼을 도로 찾아가시면, 그 부자가 탐욕스럽게 거두어들인 모든 수확물들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로마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는데, “아바리티아”(Avaritia) 입니다. “만족할 줄을 모른다”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어쩌면 이 단어가 탐욕에 대한 가장 명쾌한 해석인지도 모릅니다. 탐욕은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르는 마음”입니다. 탐욕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는 그리스 신화가 있습니다. “테살리아”(Thessaly)에 “에리직톤”(Erysichthon)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모질고,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싶어 했습니다. 한번은 백성들이 정원에 있는 큰 참나무를 사랑하고 신성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백성들은 에리직톤 왕자에게 그 참나무가 자신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설명하고, 나무를 베지 말아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그러나 에리직톤은 단박에 그 나무를 잘라버리고,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을 조롱하고 모독했습니다. 영광과 찬양은 모두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하늘이 분노했습니다. 큰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앞으로 너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영원히 허기를 채우지 못할 것이다.” “배고픔의 저주”가 그에게 내린 것입니다. 이후, 에리직톤은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늘 배가 고팠습니다. 놀랍게도, 음식을 먹는 순간에도 계속 배가 고팠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 먹고, 또 먹어야만 했습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모조리 먹는 데에만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빚을 내서 음식을 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곧 그것마저도 계속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에리직톤은 허기에 지쳐 자신의 사랑하는 딸 “메스트라”(Mestra)까지 내다 팔아버렸습니다.

얼마 후, 다시 먹을 것이 바닥난 에리직톤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결국 자신의 몸을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극심한 배고픔 때문에 통증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팔, 다리, 귀, 코, 눈까지 모조리 씹어 먹었습니다. 나중에는 “모든 것을 씹어버렸던 이빨”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탐욕의 실상”입니다. 탐욕은 우리의 눈을 실명시키고, 마음까지 얼려버리는 치명적인 흉기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자신만을 위해서 산 사람을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가 진실로 부유한 자임을 이야기하시면서 비유의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이 땅에서 삶의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부유한 자가 실제로 부유한 자입니다.

자기 쪽으로만 열리는 “탐욕의 문”은 당연히 이웃을 향해서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 문을 수백 번 열고 닫아도 그것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웃을 향한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서 계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가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행한 선행이 곧 당신께 한 것(마태 25:4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선행이 곧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잠언 19:17)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채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채권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기가 막힐 정도로 신비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베풀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 손수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눔과 섬김의 신비를 아는 “부요한 자들”이 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