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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5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Barba Non Facit Philosophum (수염이 철학자를 만들지 않는다)

예로부터 수염은 어른의 상징이었습니다. 수염이 다 자랄 때쯤 되면 비로소 성인 남자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 아이들은 사춘기가 지나면 수염을 기를 것을 권장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염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코 밑에서 윗입술까지 양쪽으로 뻗은 콧수염(mustache), 귀 밑에서 턱까지 길게 늘어진 구레나룻 수염(whisker), 그리고 아래턱에 난 턱수염(beard)을 총체적으로 “수염”이라고 부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 각 나라마다 그리고 각 시대별로 기를 것을 강조하는 수염의 부위가 달랐다는 점입니다. 어떤 나라는 콧수염과 턱수염을 동시에 강조하는 반면에 또 다른 어떤 나라는 턱수염 만을 아주 중요시 여겼습니다.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윤기 있게 뻗은 콧수염을 기를 것을 장려했고, 튀르키예 같은 이슬람 권의 국가에서는 반드시 턱수염을 기를 것을 강조했습니다. 턱수염은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예외적으로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2세기 전까지 이발을 하고, 수염을 깨끗하게 깎을 것을 권장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림이나 조각품들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털이 없는 말끔한 모습인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로마인들은 이발과 면도가 잘 되어 있으면 그를 지성적인 인물로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수염과 머리털이 터부룩하면 미개한 야만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유독 털이 많은 사람들과 지나치게 털이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털이 없는 매끈한 모습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당시에는 오직 노예들 만이 수염과 머리털을 길렀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구약시대에 수염을 기르는 것이 권장되었지만, 로마의 속국으로 지배를 받던 신약시대에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율법사 같은 전통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유태인 남자들은 거의 수염이 없었습니다. 수염은 곧 야만과 노예의 증표였습니다.

오늘 날에도 자주 질문을 받는 것 중의 하나가 “과연 예수님은 수염을 길렀을까?”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답을 줄 수는 없지만, 확률적으로 노예가 아니었던 예수님이 고집스럽게 수염을 길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날의 거의 대부분의 예술품이나 종교 영화들을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수염이 덥수룩한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마가 멸망(476)하고, 거의 천년 동안 지속되었던(1453) 동로마 시대(비잔틴 시대)에 왜곡된 것으로 보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잔틴 시대에는 고위층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수염을 풍성하게 길렀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의 그림이나 조각품도 넉넉한 수염을 기른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Basilica di Sant’Apollinare Nuovo)에 걸려 있는 모자이크 작품 “오병이어”에 보면 예수님이 수염이 전혀 없는 매끈한 청년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크로아티아(Croatia)의 포렉(Porec)에 있는 유프라시안 성당(Euphrasian basilica)에도 많은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는데, 전부 수염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소 생소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수염이 있던 없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신적 권위(divine authority)가 있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높은 사회적 위치에 있거나 존경받는 인물들의 모습을 따라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에게 멋진 외적인 혹은 내적인 특성을 부여 하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사회를 이끌어간 정치 지도자나 군대의 영웅들 그리고 정신적인 지도자들이었던 철학자들은 대부분 여러 모양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의 사람들은 수염에 대한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철학자들이 강의를 하거나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위든, 아래든, 옆이든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긴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라틴어 격언 “Barba non facit philosophum”(수염이 철학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겉모양으로 번듯하게 수염을 기르고, 어루만지며 철학자 코스프레(cosplay)를 떨어도 머리 속이 비어 있다면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같은 뜻의 격언으로 “Cucullus non facit monachum”(수도사 복이 수도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도사 복을 입고 다니면서 수도사처럼 행동을 하면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결국, 수도사를 만드는 것은 수도사의 삶과 행동입니다. 본질적인 삶이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지, 외적인 모양이나 몸짓이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 가운을 입는다고 의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목사의 옷을 걸친다고 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자가 의사를 규정하고, 교인이 목사를 증언해 줄 것입니다. 사람의 삶과 됨됨이가 그의 가치를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의 뒤를 이어 두번째 왕이 될 사람을 물색하게 됩니다. 그는 “이새”의 큰 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의 수려한 외모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과연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로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을 꾸짖으십니다. “너는 용모와 신장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라. 이 사람은 내가 원하는 자가 아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 6~7).

껍질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이고, 사람의 가치는 그 안에 담긴 삶으로 결정이 됩니다. 예전에 네 번째 결혼식을 하던 한 여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들이 한번 치루기도 쉽지 않은 결혼식을 젊은 나이에 이미 세번이나 치뤘습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비아냥을 들으면서 몹시 속상해 했습니다. “이전의 남자들은 진정한 운명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지금 이 남자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베필이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이제는 중세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교인이 감행하겠다고 우기면 목사들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목사가 거절한다고 해서 안 할 것도 아니고, 자칫하면 그와 연관된 가족들과 성도들을 잃을 것이 뻔하고, 나중에는 “사랑이 없는 목사”라는 치명적인 욕 바가지를 뒤집어 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냥 눈 딱 감고 해버리는 것이 대세입니다. 그 자매를 주례하던 목사님의 말씀이 두고두고 저의 가슴 속에 남았습니다. “이제는 두 사람의 만남이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부부의 만남이라는 것을 예식이 아닌 삶을 통해 증거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삶을 통해 입증이 됩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