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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6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Desidero Ergo Sum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욕망을 갖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깊은 우물을 가슴에 한 복판에 품고 살아갑니다. 욕망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싸잡아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검의 양날처럼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을 것입니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잠을 잡니다. 또, 좋은 배우자를 찾아 사랑을 나누고 자식을 낳아 대를 잇습니다(식욕, 수면욕, 성욕). 게다가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있기에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세상을 발전시킵니다. 또 명예에 대한 욕망이 현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노력할 수 있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기도 하고,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명예롭게 자존심을 가지고 선을 긋게 됩니다(물욕, 명예욕).

욕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더 부지런히 열심히 일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동물처럼 낮은 단계의 삶을 거절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남원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널브러졌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 그리고, 뜯어먹은 자들도 머지않아 죽고 말았다…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조선의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그것을 핥아먹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 욕망이 없으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욕심으로 변하게 될 때, 모든 일은 어김없이 죄를 위한 전주곡으로 변하게 됩니다. 맹목적인 욕심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어김없이 비극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신약의 사도 “야고보”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 1:15). 야고보 사도는 모든 일 중에서 욕심이 생기는 것을 가장 경계했던 것입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합리론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명제를 던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정작 의심을 하고 있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 입니다. 데카르트는 정신을 육체를 지배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반면에 네덜란드의 합리론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정신이나 육체는 서로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둘 다 모두 욕망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Desidero ergo sum”(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나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는 욕망을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욕망은 사람의 살아있는 한 멈출 수 없는 본능입니다.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되겠지만, 반대로 지배를 당하게 된다면, 인생을 망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오천 불이 간절히 필요했던 어떤 남자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삼만 불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 주변의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만 불을, 또 가장 아픈 사람을 위해서 만 불을 그리고 지금 출석하는 어려운 교회에 오천 불을 헌금하고, 저를 위해서도 오천 불을 사용하겠습니다. 제 기도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이 남자는 뻘쭘하게 자기를 위해서 오천 불만 구하기 보다는 삼만 불을 달라고 해서 좋은 곳에 두루두루 사용하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매일 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갑자기 변호사 사무실에서 삼만 불을 수령해 가라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이름 모르는 친척 한 분이 죽으면서 자신의 재산을 미국에 살고 있던 친척들에게 유산으로 남겼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그 남자였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유증하는 금액이 삼만 불이었습니다. 이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로 생각해야 할지 무척 고민스러웠습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께 서약한 대로 세 가지를 이행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만 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자기가 돈을 주어야 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행에 통장 한 두 개씩은 가지고 있었고, 누구나 믿는 구석들이 한 두가지는 다 있었습니다. 가만이 생각해 보니까,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그 서약했던 만 불을 자기에게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두 번째로 주변의 가장 아픈 사람에게 만 불을 주려고 찾아보았는데, 이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료보험이 있었고, 설령 그런 형편이 아니더라도 미국에서는 의료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중병에 걸리면 여러가지 극빈자 프로그램이 있어서 무상으로 또는 저렴한 가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돈이 치료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자신도 생각해보니까, 아픈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팔, 다리, 머리, 허리, 삭신이 다 아팠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서약도 쉽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픈 자기에게 만 불을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다니는 가난한 개척교회에 오천 불을 헌금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언제까지 헌금을 하겠다고 작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오천 불을 헌금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만 불 또는 이만 불을 목돈으로 헌금하면 교회가 더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참으로 지혜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오천 불 마저도 밝은 미래를 위해 자신이 좀 더 맡아 두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이런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그래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제동장치가 없다면, 지옥이라는 종착역에서나 멈추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만족”하면 반드시 자랑하게 되어 있고, “부족”하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조절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족”을 통해 인생을 복되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욕망이 축복이 되게 하거나 저주가 되게 하는 것은 결국 결국 인생을 풀어가는 사람의 몫입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비수 있습니다.”(빌 4: 11~13)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