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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7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아버지

몇 년 전에 한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수업 중에 여자 선생님의 멱살을 쥐고 욕을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요즘에는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마도, 여선생님이 큰 누나 정도되는 젊은 분이어서 쉽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욱”하는 젊은 성질 때문에 선생님에게 막말을 하고 대든 것입니다. 곧바로, 무서운 학생주임 선생님이 와서 학생을 교무실로 끌고 갔습니다. 그 여자 선생님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학생의 부모님이 학교로 소환을 당했습니다. 교장실에서 발생했던 모든 일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분명히 “퇴학”이나 “장기정학” 감입니다. 학생의 어머니는 울면서 고개를 떨구시고,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을 대신해서 교장 선생님과 그 자리에 모이신 여러 선생님들께 연신 머리를 숙여 백배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 아들이 퇴학을 당하거나, 불미스러운 처벌을 받는 것을 막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습니다. 아버지는 교장실에서 솔선해서 반성문을 쓰셨습니다. “아들을 잘못 가르친 죄”,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을 드린 죄” 그리고 “신성한 학교에서 큰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반성문 마지막에는 작을 대로 작아진 초라한 모습의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격려의 글도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현재의 죄를 깊이 반성하고, 이 과오를 앞으로 미래를 헤쳐 나아갈 인생의 디딤돌로 삼아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바란다. 너를 사랑하는 아빠가!” 아버지는 반성문 쓰기를 마치신 후에 교무실로 가서 그 딸 같은 젊은 여자 선생님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깊이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들은 이런 아버지를 보면서 하염없이 속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행여 아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결격사유가 생길까 봐,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몸으로 아들의 죄를 끌어 안는 아버지의 모습에 그 누구도 더 이상 아들의 과실을 문제 삼을 수 없었습니다. 여자 선생님도 몸 둘 바를 모르고 당황해 하다가 결국 학생을 끌어 안고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교무실 안이 숙연 해졌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다 아버지의 모습에 감동해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아버지는 사죄의 표시로 아들과 함께 복도에서 뒷문까지 매일 쓸고 닦으면서 일주일 동안 청소를 하셨습니다. 학교는 학생에게 어떤 징계나 처벌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런 아버지 밑에서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가족을 대표하시는 가부장과 권위의 상징이시지만,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그 모든 것을 쉽게 내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입니다.

이스라엘도 한국처럼 가부장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던 나라입니다. 당연히 “아버지”를 최고의 권위와 존경의 상징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존재이신 “하나님” 이름 뒤에 “아버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 라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설명하려는 것이지, 하나님이 남자이시거나 또는 여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성별이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하나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 체제의 엄격하고 근엄하신 아버지입니다. 항상 올곧으시고 무서운 분입니다. 잘나고, 똑똑하고, 일등 하는 아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지만, 반대로, 모자라고 형편없는 짓을 하는 아들은 근엄하게 꾸짖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창기와 세리 같은 빗나간 자식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거룩하고 위대하신 이름이라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이미지의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자애로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친근하고, 부드럽고, 관대하신 아버지 같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 하나님을 “누가복음 15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쳐주었던 율법주의적인 하나님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소개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도전과 충격을 주는 혁명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의 비유로 소개되었습니다. 첫번째는 잃어버린 새끼양을 찾아 다니는 목자의 모습으로, 두번째는, 열개의 드라크마 동전 중에서 한 개를 잃어버린 여인이 간절하게 그 동전을 찾는 모습으로, 그리고 세 번째는 집을 나간 아들을 날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이 세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하나님입니다. 공통점은 잃어버린 것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아버지입니다. 찾으신 후에는 너무 기뻐서 사람들을 불러 크게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이 세 비유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에는 손익 계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또, 용서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은 것 만으로도 기뻐하시고 만족해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세번째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분명하게 각인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 이야기 속에서도 주인공은 역시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저버리고 멀리 타국으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애타게 했던 둘째 아들과 아버지의 집에 남아서 온갖 심술을 부리는 큰 아들을 아버지는 똑같이 사랑하시고, 그들의 과실을 묻지 않고 품어 주시는 분입니다.

다른 비유에서도 그렇지만, 이 탕자의 비유에서도 역시 몇 가지 똑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첫번째는 “기다리시고 찾으시는 아버지”입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와서 훗날 자기에게 돌아오게 될 유산의 분깃을 운운하며 미리 달라고 떼를 써서 먼 타국으로 떠난 비정한 둘째 아들이 등장합니다. 대단한 계획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 형편없는 아들놈은 타국에 가자마자 온갖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창기들과 뒤섞여 살면서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맙니다. 아버지의 피와 땀과 청춘이 담겨 있는 소중한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까먹은 것입니다. 아주 나쁜 아들입니다. 그는 무일푼 거지가 되었지만, 쪽제비도 낯짝이 있다고 감히 아버지께 돌아올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게다가, 극심한 흉년까지 겹쳐서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위기에 몰리게 되자, 그는 한 인색한 부자의 돼지들을 돌보는 딱한 처지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나쁜 아들을 여전히 기다립니다.

아버지는 이 철없는 둘째아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서 항상 발만 동동 구르며, 매일 날이 밝으면 타는 가슴으로 동구 밖에 나아가 이 아들만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이 아들이 가지고 나간 돈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형편이 더 나빠집니다. 아들은 이제 돼지와 함께 쥐엄나무 열매를 나눠 먹는 막장인생이 되고 맙니다.

유대인이 돼지와 함께 먹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얼마나 비참해졌는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돼지는 먹어도, 돼지하고 같이 먹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가련한 아들은 돼지같이 살아갑니다. 그제서야 그는 스스로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과 품꾼이 얼마나 많았던가!”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말하리라. 아버지 저를 더 이상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냥 품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의 비참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이런 생각이나 말들이 필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아들이 돌아오는 것 만으로 만족해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두번째로 이 아버지는 무조건 용서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에게는 용서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거지꼴로 돌아오는 이 아들을 보고 달려가서 끌어 안고 입을 맞추며 감격해 했습니다. 아무런 질타의 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반겨 맞으면서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신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세번째로 아버지는 망가진 아들의 모든 신원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다”고 선언하면서 그가 여전히 당신의 아들임을 천명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기다리고, 찾고,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모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번 주에는 아버지 날(Father’s Day)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귀한 아버지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