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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31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더”와“덜”

세상살이는 “더”와 “덜”의 싸움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더 활동적으로 학창시절을 보내기를 원하시지만, 자녀들은 구속 받는 것이 싫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좋아서 부모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덜 하려고만 합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어하고, 학생들은 덜 배우고 싶어합니다. 고용주는 노동자들이 더 일해주기를 원하지만 임금은 덜 주고 싶어합니다. 반대로, 노동자는 덜 일하고 더 많이 받고 싶어합니다.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관객들이 참여해서 인산인해를 이루기 원하지만,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덜 붐벼서 편안하게 행사에 참여하고 싶어합니다.

미국에 처음 유학을 와서 잠깐 동안 도서관에서 시간제로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험 기간 중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도서관에 많이 있었습니다. 교수님들은 이따금 도서관을 들렀다가 일을 마치고 나가시면서 학생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열심히 공부하세요”(Study hard!)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학생들끼리를 헤어질 때는, “너무 열심히 하지 마”(Don’t work too much!)하며 인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로 상반된 두 가지의 관심이 한 공간에 존재합니다.

제 안에도 항상 “더”하고 싶은 마음과 “덜”하고 싶은 마음이 싸움을 벌입니다. 재미있고, 좋은 것은 “더”하고 싶고, 불편하거나 어려운 것은 “덜”하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이 다툼을 벌입니다. 잠언 24장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 하면,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잠언 24:33~34). 머리 속에서는 “이제 그만”이라고 선언을 하는데, 이미 편안함에 익숙해진 몸뚱이는 “계속 더”를 요구합니다. 양심은 언제나 “비록 손해를 보고 불편하더라도 “좀 더” 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지만, 이기심에 오염된 몸은 “이제 됐어, 그만하면 충분해” 하면서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도록 끊임없이 충동질을 합니다. 신기하게도 어떤 날은 자면서도 “더”와 “덜”의 두 마음이 싸움을 합니다. 꿈 속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내가 황당한 일의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날은 꿈자리가 아주 사납습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를 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내 자신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갖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실낱 같은 희망을 보기도 합니다.

분명히 “더” 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은데, 너무 힘들고 피곤하니까, “이제 그만 해도 충분히 많이 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목사라는 놈이 그러면 안된다.” 듣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리가 점점 더 커집니다. “주님, 저도 인간이라구요. 자꾸 이러시면 저 힘듭니다” 어떤 때는 혼잣말로 구시렁거려보지만, 아직 하나님을 이겨 본 적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경험하는 일들일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청년 사역을 할 때, 밤에 청년들을 데리고 산기도를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매주 적어도 두 번 이상은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청년들을 설득해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매 주 쉬지 않고 하려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은 내가 했으니 너희들끼리 끝까지 최선을 다 해 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뒤 늦게 산기도에 재미가 든 청년들이 제가 함께 가지 않으면 자기들도 멈추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스스로 선언을 하고 이불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청하는데, 자꾸 소리가 하나가 귓전을 맴돕니다. “그렇게 자니까 좋냐?” 제가 혼잣말로 응수합니다. “아! 오늘 낮에 정말 일 많이 했다구요! 저도 쉬어야지요” 투덜거리며 이불을 뒤집어 썼는데, 결국 몇 분 후에 청년들 간식거리를 사서 산으로 운전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더”가 “덜”을 이긴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여태까지의 나의 목회는 항상 이 “덜”과 “더”의 싸움이었습니다. 유방암에 걸려서 마지막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집사님을 매 주일마다 양로원에서 교회로 출퇴근을 시키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후암에 걸려서 각혈을 하며 침상에 누워 일주일 내내 저만 기다리시던 권사님과 이 년 동안 성경공부를 함께 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종합병원에 장기 입원해서 허벅지에 생긴 골수암 치료를 받던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님도 있었습니다. 이 분들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살 썩는 냄새가 심했습니다. 역한 피고름 냄새와 휘발성의 포르말린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도 내놓은 분들이니 얼마나 외롭고 절망적이었겠습니까? 말기 시한부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금방 하나님의 나라로 가실 줄 알았는데, 오랜 기간을 투병하면서 버티셨습니다. “목사님을 보면 힘이 납니다. 자주 오셔서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세요!” 그 분들의 애절한 부탁에 겉으로는 “그럼요. 당연하지요” 웃으면서 손을 들어 주먹을 불끈 쥐며 그분들을 격려했지만, 사실 저는 그분들 대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제 그만 하면 됐어. 네가 무슨 성자냐? 착각하지 마. 다른 일은 안 해?” 마음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아직 목회를 잘 모르던 젊은 나이여서 그랬을까요? 이제 “덜”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 분들을 향한 마음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 순간, 그 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양로원 백인 할아버지의 목욕을 매주 돕겠다던 약속, 아프리카와 니카라과의 두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돕겠다던 약속, 그리고 내 싸움도 아닌데 약자를 돌봐야 한다는 주제 넘은 오지랖 때문에 본의 아니게 끝도 없는 긴 법정싸움에 끼어 들었다가 큰 낭패를 본 적도 있었습니다. 의도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끝의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마침내는 탈진해버린 것입니다. 목회의 속성상 어쩔 수 없이 많은 일들에 연루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싸움을 치뤄왔습니다.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할 줄 알아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상은 그렇게 매몰차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서 손을 떼지 말고, 조금 더 하지 않으면, 저 사람은 이제 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너무도 분명한 현실을 눈감을 수 없었습니다. “더”와 “덜”의 경계선을 구분하지 못해서 가족들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큰 불편함을 자주 주어 왔기 때문에, “이제 앞으로는 더 이상 쓸 데 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덧 목회 중후반기에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일은 성공을 추구하는 사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처세술처럼, “더”와 “덜”을 잘 구분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의 은혜로 가는 데까지 열심히 가면 그 뿐입니다. 그리고, “더”하고 “덜”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힘들었지만, “더”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축복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것 만으로도 인생의 큰 감동이었습니다. 더 많이 쓰임 받으면 기쁨이 더 클 것이고, 조금 덜 쓰임을 받으면 그럴 기회를 얻은 것 만으로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더”와 “덜”의 경계가 없어졌습니다. 갈등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냥 가면 그 뿐입니다. “더”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만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덜”하게 되었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 됩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나아가실 것입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