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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3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불을 꺼보세요

한국이 이제는 완전하게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가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외국인들로 넘쳐납니다. 주말이 되면 도시 안팎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어 볼 만한 장소를 발견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사진을 찍습니다. 경치가 좋은 곳이나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야! 여기 멋지다. 여기서 사진 한 장 같이 찍자”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멋진 모습을 상상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추억이 될만한 멋진 조형물이나 신록이 우거진 명당자리, 그리고 꽃들이 활짝 핀 아름다운 장소들을 만나게 되면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아니면 화려한 색상의 꽃들로 짙게 수놓은 화단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게 되면, 과연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꽃이 아름다우니까 자신이 꽃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 자기도 꽃처럼 예쁘게 찍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착각입니다! 꽃 옆에 붙어 있으면 꽃 때문에 사람이 죽습니다. 웬만한 미모로 꽃을 이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쁜 꽃밭에서 활짝 웃으면 웃을수록 정작 예쁘게 살아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꽃입니다. 주인공은 언제나 꽃입니다.

멋지게 찍힌 당신의 사진을 보고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이미 환경에 져서 묻혀버린 것입니다. “자기야, 여기 어디야?” 당신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사진을 본 사람은 처음부터 당신을 본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배경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는 참 사진이 잘 받는다”라든지, “자기는 점점 더 예뻐지는 것 같아”라고 반응한다면, 당신이 환경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꽃밭에서 사진을 찍으면 “우리가 꽃과 함께 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당신을 배경으로 해서 꽃들이 활짝 피어납니다. 우리들의 웬만한 얼굴과 몸매로는 좀처럼 예쁜 꽃을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변이 죽어줘야 내가 살 텐데, 주변이 너무 환하게 빛이 나니까 반대로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꽃밭이나, 하얀 모래가 밟히는 아름다운 바닷가의 백사장, 석양이 지는 호숫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경하는 높은 자리 등은 결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야 내가 부각이 되고, 멋지게 나올 수 있을까요?

“더러운 똥물이 역류하는 하수구, 쓰레기로 뒤덮인 공사장, 망가진 차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자동차 폐차장, 그리고 아무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교회의 부엌이나 화장실,” 오히려 이런 더럽고 추한 데서 일하는 모습을 렌즈에 담을 때, ‘내’가 살아납니다. 사진의 배경이 볼품없이 추하고 부족해서 아무도 집중하지 않을 때, 오히려 사람이 돋보이게 됩니다.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사람밖에 없을 때에만, 비로소 그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변이 어둡게 죽어야만 주인공에게로 모든 관심이 집중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간다고 하더니, 눈 집었구나?”, “코도 했네”, “볼에 보톡스도 맞았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사진 속의 사람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진들은 대부분 예쁘고 화려한 모습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곳에서 헌신적으로 섬기는 모습들입니다. 예를 들면, 노숙자들이 모인 곳에서 음식을 나누고 땀 흘리는 모습입니다. 양로원이나 교도소에서 힘들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북돋는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허드렛일을 솔선해서 구슬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배경들이 다 빛을 잃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본질이 빛나게 됩니다.

연극이나 오페라를 관람하게 되면 어두컴컴한 무대를 환하게 밝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조명을 다 켜서 무대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부분만 조명을 켜서 그곳만 집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체를 다 환하게 밝히는 방법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집중력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후자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연주를 하거나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다른 부분들의 조명을 꺼서 사람들이 집중되는 부분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한 곳만 집중하게 될 때, 공연의 효과도 커지고, 기대하는 결과도 얻게 될 것입니다. 관객들이 한쪽만 주목하고 집중하게 만들기 위하기는 반드시 다른 조명들을 어둡게 죽여야만 합니다. 그래야 주인공이 살아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만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불을 꺼버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입니다. 당시의 사람들 중에는 세례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보다는 세례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때였습니다.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허락되었던 모든 시간을 접으면서 유명한 말로 자신에게 투사되었던 조명을 꺼버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위대한 이유입니다.

“예수,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요한 3:30)

성경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불을 지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불을 꺼버린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도 그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말년에 로마로 압송되어 가서 옥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속의 불편한 상태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힘을 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서 열심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사도 바울의 소식을 듣고, “형제들 중 다수”가 “더욱 신뢰함으로” 확신을 얻어 자신들도 겁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전파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반대되는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옳지 못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러니까, 사도 바울에 대한 “질투와 경쟁심으로” 이전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증거한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사도 바울에게만 집중되었던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과 “지지”와 “사랑”을,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이 순간에 전부 자신들에게로 끌어오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이 시간보다 더 좋은 기회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열심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해서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안달이 나고, 똥줄이 타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고” 그래서 바울을 반대하는 몇몇 사역자들은 더욱더 열심히 주님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동기가 불손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분노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답변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립보서 1장 18절)

사랑하는 예수님만 증거될 수 있다면, “나는 무조건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순전한 고백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신에게 향한 조명을 꺼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 바울의 뜨거운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들도 용기를 내어 오직 주님만 드러내십시오! 당신이 바로 세례 요한이고, 사도 바울입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