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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8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양심의 소리

알베르 카뮈의 소설 ‘전락’(La Chute)에 보면, 잘 나가는 변호사 ‘장바띠스뜨 끌라망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파리에서 가장 명망이 높던 변호사였습니다. 빼어난 외모와 잘 절제되고 세련된 매너 그리고 탁월한 언변과 유창한 화술은 법조계와 사교계를 뛰어넘어 당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성공의 모델로 자리매김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요즘으로 이야기하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의와 싸우는 정의로운 인권 변호사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는 정상에 있던 변호사였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우월감과 자부심을 가질 만큼 그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끌라망스는 자신이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고공행진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추락(chute)하기 시작합니다. 성실하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그는 세느강 퐁루아얄 다리 위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강물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허탈한 표정의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직감합니다. ‘저 여인은 곧 자살을 선택하겠구나!’ 갑자기 머리 속이 복잡해졌습니다.두 마음이 싸움을 시작합니다. ‘혹시 일어나게 될지 모를 자살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지?’ 아니면 ‘괜히, 쓸데없는 일에 휘말렸다가 인생이 복잡하게 꼬이는 멍청한 짓을 할 것인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끌라망스는 마음의 문을 닫고 못 본 척해버립니다. 별의별 일들을 많이 다루면서 법조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오지랖 넓은 짓이 얼마나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끌라망스는 합리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지나 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날카로운 파열음 소리를 내며 물 속에 몸을 던진 그녀의 외마디 비명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는 또 망설입니다. ‘달려가서 물 속에 뛰어든 그녀를 구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 소리도 못들은 척하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갈지.’ 그가 망설이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을 때,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녀는 조용히 가라앉고 맙니다. 그가 뒤돌아 보았을 때,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그녀의 머리 상단부 검은 정수리 뿐이었습니다. 끌라망스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잘 한거야! 그녀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구. 누구나 다 나같이 했을거야.” 결국, 그는 이 사건을 외면해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불편한 사건을 잊어버립니다.

그는 출퇴근할 때에 건너야 했던 세느강 퐁루아얄 다리를 퐁데자르 다리로 바꿉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불편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몇 년 후, 끌라망스는 다리의 중간 즈음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묘한 ‘웃음 소리’를 듣게 됩니다.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지, 언젠가 보았던 검은 점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날부터 끌라망스는 추락을 시작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비웃었습니다. 언제나 성실하고 도덕적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지켜주었던 완벽한 인간상을 지닌 그를 이 정체 모를 웃음 소리는 계속해서 따라다니며 조롱했습니다. 그는 훗날 독백합니다. 그 소리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의 거짓과 위선을 꾸짖는 ‘양심의 소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립니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 전혀 알지 못하는 척 하면서 인식의 공간 어딘가에 경계선을 그어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잘 몰라서 그랬다”라는 말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그렇다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자기 합리화를 모색합니다. 나름대로 살기 위해서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구석 어딘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불편한 기억은 이내 모난 병조각이 되어 우리를 찌르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이민사회 속에서 자주 접하는 것 중의 하나가 ‘힘의 논리’입니다. 힘이 있으면, 무조건 그 사람에게 굴종하려고 합니다. 그 옛날 우리 조상이 가졌던 부끄러운 ‘사대’(事大), 모화(慕華) 사상을 여전히 반복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가 또는 그른가?”(What is right or wrong?)는 문제 삼지 않습니다. 또 “무엇이 좋은가 또는 나쁜가?”(What is good or bad?)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무엇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가?”(What is profitable?)에만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되어도 진실을 외면하면 머지않아 소설 속의 끌라망스가 겪었던 양심의 꾸짖음을 똑같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페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가 1955년에 지은 ‘재능 있는 리플리 씨’(The talented Mr. Ripley)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성공에 눈먼 호텔 종업원 ‘톰 리플리’는 재벌의 아들인 친구 ‘디키 그린리프’를 동경합니다. 어느 날, 그는 그를 죽이고, 자신이 그린리프인 것처럼 신분을 바꾸어 생활합니다. 하루 아침에 인생 밑바닥의 생활에서 초호화 인생으로 삶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자연스럽게 ‘그린리프’의 삶을 살아갑니다. 거짓말도 아주 능수능란하게 잘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더 대범한 거짓말을 연발합니다. 덕분에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그린리프라고 믿게 됩니다. 나중에는 리플리 자신도 스스로를 그린리프라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죽은 그린리프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모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리플리의 경악스러운 거짓말은 모두 들통이 납니다.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 입니다. 다른 말로는 ‘리플리 병’ 또는 ‘리플리 효과’라고도 하는데,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사는 정신병을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리플리 증후군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습적으로 거짓말과 악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허구의 세상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은 아무리 문학적인 소재로 자주 사용되고,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화되어도, 의학적으로는 반 사회적인 정신질환일 뿐입니다. 병은 치료해야 합니다. 리플리 증후군을 앓는 사람도 딱하지만, 그 주변에서 그의 말을 믿고 허구의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도 딱하기는 매 한가지 입니다. 어떤 때는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리가 어렵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가공된 세상의 삶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이미 지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침묵 내지는 적당한 변명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허구의 삶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마음 속 어딘가에 있는 찜찜한 기억이 끝까지 살아서 죽는 날까지 당신의 양심을 찌르고 비웃을 것입니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과거를 왜 자꾸 들추나!’ 불편해하겠지만, 지난 일을 외면하고 모른 체하면 머지않아 ‘똑같은 내용’, ‘다른 모양’의 유사한 악행들이 반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당신이 그 일의 중심에 놓이는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눈을 크게 떠서 현실을 바르게 분별하고, 잘못된 것을 바르게 잡는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열매로 거짓된 자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따겠느냐?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로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마태 7: 16~20) 삶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삶의 열매로 그 사실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열매가 진실을 말해 줄 것입니다. 열매를 보고 깨닫는다면, 바로 잡을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