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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6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자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클레르보의 성(聖) 베르나르도’(Bernard de Clairvaux)만큼 인간의 양면성(兩面性)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베르나르도는 12세기 시토회 베네딕토 계열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당시 대중들에게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소명을 일깨우는 감동적인 설교를 했는데,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원정에 오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십자군 원정에 자원할 만큼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천사라는 말을 듣던 성인(聖人)이었습니다. 그에 관한 전설적인 일화들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찬양시도 많이 지었는데, 그중에는 오늘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새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도 그의 작품입니다.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게 하는 찬송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을까”

그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단호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놀랍게도 전쟁에 나가는 십자군 용사들에게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하는 잔혹한 말을 한 것입니다. “이교도들을 인정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애들도 남기지 말고 보는 대로 다 죽여라!” 그들에게는 전도도 아까우니,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다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거룩한 성인이라 할지라도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사건입니다. 심지어는 성난 병사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그들을 독려했습니다. 칼을 든 병사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다 하라고 한다면, 과연 그들이 연약한 여자와 어린아이들에게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물으나 마나 잔혹한 살인과 강간, 방화 그리고 약탈일 것입니다. 어쩌면, 베르나르도는 이런 모든 일들이 전쟁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의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로마서 3:10)고 강조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면 그때부터는 짐승이 됩니다.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다 그대로 하면 그것이 바로 짐승입니다. 짐승은 절제하지 않습니다. 본능에 충실합니다. 잡아먹고 싶으면 잡아먹고, 빼앗고 싶으면 빼앗고, 죽이고 싶으면 죽입니다. 동정심이나 자비심을 가지고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짐승에게 ‘양심’(conscience)이나 ‘도덕’(morality)이란 너무 사치한 단어입니다. 짐승은 모든 삶의 기준이 ‘자신의 욕구’입니다. 이미 남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태도는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공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도 모릅니다. 체면이나 명예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거나 투자할 줄도 모릅니다. 그냥 그때그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짐승입니다. 짐승의 세계를 지배하는 정신은 “약육강식”(弱肉强食) 입니다. 크고 센 놈이 다 먹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생존하기 위해서 더 짐승스러워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짐승을 경멸하거나 증오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보통 ‘네 발로 다니고 강한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털 달린 야생 동물’을 지칭합니다. 애완용 물고기나 새장 안에 있는 십자매나 구관조 같은 예쁜 새를 보고 짐승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산짐승, 들짐승, 날짐승 등을 가리지 않고 전부 싸잡아서 ‘금수’(禽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짐승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공격적이고 비윤리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사람에게는 이 ‘짐승’이라는 단어를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크게 분류를 할 때, 사람도 짐승 중의 하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람과 짐승을 동일시하게 되면 단번에 불쾌감을 줍니다. 사람을 짐승에 비유하면 그 자체가 이미 ‘욕’입니다. “짐승 같은 놈”, “짐승만도 못한 놈”, “짐승보다 더한 놈”, 어떻게 표현을 하든 짐승과 비교를 하면 기분이 상합니다.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요즘에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짐승남’, ‘야생남’, ‘육식남’과 같은 이상한 신조어들을 만들고, 그런 존재들에게 매력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대부분 짐승처럼 육체가 강하고 근육이 발달된 경우를 지칭하거나 성적으로 매력이 있을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불교나 동양종교 중에는 사람을 짐승에 포함시켜서 ‘윤회하는 존재’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돌이나 흙 그리고 풀과 나무 같은 감정이 없는 무정물(無情物)들은 윤회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나 짐승은 감정이 있는 유정물(有情物)이기 때문에 사람과 함께 윤회의 대상으로 묶어버립니다. 사람이 전생에서 못된 짓을 하거나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게 되면 그것이 ‘카르마’(Karma) 즉, ‘업’(業)이 되어 다음 후생에서는 짐승의 단계로 강등되어 태어난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짐승 같은 짓을 하게 되면, 실제로 짐승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로 이 윤회 사상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보통은 사람을 짐승과 분리시켜 생각합니다. 사람을 짐승과 구별하는 이유는 사람에게는 ‘윤리’가 있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종교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사람에게도 짐승 같은 특징과 성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짐승을 따로 떼어 설명하는 이유는 사람에게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는 ‘윤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윤리를 지키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평가하고 심판하시는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이것을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사람에게서 이런 ‘신인식’(神認識)을 제외하고 나면, 그는 곧바로 짐승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절제하고, 인내하고, 포기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이 땅에서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9:27). 그러므로 종교인이든, 비 종교인이든, 사람은 자신을 만드신 조물주를 염두에 두고 살아갈 때, 최고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욕심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고,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바른 것인지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윤리가 있고, 그것을 따라야 하는 당위성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요즘에 출판되는 많은 책이나 대중 매체들을 보게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이 짧기 때문에 참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런 빗나간 이데올로기 덕분에 우리는 그 폐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말도 꺼내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당당하게 법적인 도움과 지지를 받으면서 행동으로 옮깁니다. ‘비륜(非倫)과 불륜(不倫)’이 ‘인간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자, 세상이 곧바로 짐승의 세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세상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 바이러스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의 인위적인 조작으로 인해서 탄생한 것인지에 대해서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도 감염시키려고 한 ‘슈퍼 전파자’의 이야기도 매일 들었습니다.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헌신짝처럼 짓밟아버린 짐승 같은 사람들 때문에 미국 전체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방화와 약탈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인권의 회복이라는 명제하에 모여서 또 다른 범죄들을 생산해 냈습니다. 오랜 경제 침체와 도처에서 일어나는 전쟁 소식으로 인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영락없이 짐승들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우리 안의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양심을 캐내어 하나님 앞에서 다시 깨끗하게 닦아내는 시간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성의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