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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4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Figulus Figulo Invidet, Faber Fabro" (옹기장이는 옹기장이를 시샘하고, 대장장이는 대장장이를 시샘한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같은 업종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동일한 물건을 취급하는 상인들은 오히려 서로에게 치명적인 천적(天敵)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앞지르고 먼저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항상 그를 견제하고 그의 약점이나 결함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선의의 경쟁이나 건강한 협력관계라는 말은 도덕군자들의 책에나 나올 뿐입니다. 어떻게 하든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밀어내거나 그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 권모술수를 부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짓을 도모합니다. 어떤 때는 사람의 심성이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간파했던 중국의 고대 철학자 “순자”(荀子)의 주장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시대에도 이런 일들은 현대 만큼이나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가 있었습니다.

“옹기장이가 같은 옹기장이를 미워하는 것은 자기보다 더 멋진 그릇을 빚어내는 재주를 가졌기 때문이고, 대장장이가 같은 대장장이를 깔보고 무시하는 것은 자기보다 더 뜨거운 열기로 무쇠를 다듬기 때문이다.”

밥을 빌어먹는 거지들에 대해서조차 비슷한 류의 시가 있었습니다.

“문 옆으로 다른 거지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거렁뱅이 가슴은 철렁한다네”

“개에게 부엌 친구는 없다”라는 속담도 있고, “동일한 두 산이 만나 하나가 되는 법은 없다”라는 말도 있습니다.(라틴어 격언집, 212~213쪽)

군인은 군인에 의해서 죽고, 정치인은 정치인에 의해서 제거됩니다. 기업을 무너뜨리는 것은 또 다른 야심 찬 기업입니다. 항상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이고 죽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많은 범죄학자들은 살인이나 강간 그리고 강도, 절도의 90%는 언제나 주변의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독을 품고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좀처럼 흔한 일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어떤 특정 계층의 사람들도 아니고,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인데, 그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분노의 칼을 휘두르는 “묻지마 살인”이 왕왕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통전적인 사고가 무너진 망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사회 병리현상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죽음의 전주곡을 연주하는 사람은 언제나 “같은 삶의 영역을 공유하는 친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언제나 매몰찬 등돌림이 일어나고, 배반의 칼날이 춤을 춥니다.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Who crucified Jesus?)라는 제목의 책들이 그 동안 참 많이 출간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책도 “누가, 무엇을 위해서 예수를 살해했다”고 콕 집어서 단언하지 않습니다. 로마인들(Romans)이 죽였다고 말하지도 않고, 유대인들 (Jews)이 죽였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이 은 30에 자신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죽인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하수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책들이 사회적인 파장이나 특정 집단의 강렬한 항의를 의식해서인지 언제나 애매모호한 말로 알쏭달쏭하게 결론을 맺습니다. 당시 사회의 혼란스러운 구조와 각 계층의 사람들이 빚어내는 이득 관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헷갈리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런데 정말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손을 털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예수 주변에 있을까요? 예수를 팔고, 부인하고, 등돌리고, 비정하게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은 정말 진범도 공범도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에라스무스는 당시 신부였던 아버지와 의사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였습니다. 성직자는 결혼할 수 없었는데 아버지가 그 독신 서약을 깼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환영 받지 못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훗날 종교개혁자들과 뜻을 같이 하면서도 아버지의 교회 가톨릭을 부정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개혁을 위해 의롭게 투쟁하는 개혁자들을 외면하고 가톨릭 교회의 부드러운 손짓을 받아 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덕분에 그는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박쥐라는 비난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양쪽 진영을 다 피해서 단지 인문주의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교회의 적은 교회이고, 목사의 적은 목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수평이동과 세습으로 거대해진 교회가 무너지면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은 같은 동네의 교회들입니다. 목사가 비난을 받고 정죄를 당하면, 그 진위를 가리기도 전에 망나니 칼 춤부터 추는 사람들이 또한 목사들입니다. 성직자들이 이럴진대 하물며 세상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옹기장이는 옹기장이를 시샘하고, 대장장이는 대장장이를 시샘한다”(The potter envies the potter, the smith envies the smith). 이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