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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Tantali Poenae" (탄탈로스의 형벌)

“없어서 받게 되는 고통”과 “있는데 누리지 못하는 고통”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참기 힘들까요? 궁극적으로는 둘 다 빈곤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수중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매일 시각적으로 바라보고 확인해야 하는 후자의 경우가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탄탈로스의 형벌”(The punishments of Tantalus)이라는 말은 이미 많은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도 정작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리디아의 전설적인 왕이었던 “탄탈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최고의 신이었던 “제우스”와 티탄족의 요정 “플루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탄탈로스는 아버지 제우스의 총애를 받아 자주 신들의 연회에 참석을 했고, 그들이 먹는 음식인 암브로시아(ambrosia)와 넥타르(nectar)를 함께 나누며 대화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익숙해진 탄타로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신들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사람들에게 떠벌이기도 했고, 그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훔쳐다 친구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도 했습니다.

신들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탄탈로스는 그들이 정말 신통력과 분별력이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나눴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 “펠롭스”(Pelops)를 죽여 그의 고기로 여러가지 진귀한 요리들을 만들어 잔칫상에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신들은 단번에 탄탈로스의 간악하고 오만한 생각을 꿰뚫어보고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랑하는 딸 “페르세포네”가 “하데스”(Hades)에게 납치되어 깊은 시름에 빠졌던 여신 “데메테르”(Demeter)만이 아무 생각없이 그 고기를 먹고 말았습니다. 신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마음껏 조롱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제우스는 분노해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나락(奈落)의 세계 “타르타로스”(Tartaros)에 이 “탄타로스”를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곳은 안개가 가득하고 음산한 기운이 넘쳐서 신들조차도 가기를 꺼리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무자비하게 죽음을 당한 펠롭스를 다시 살려냈지만, 여신 데메테르가 먹어 버린 그의 어깨 부분의 살은 되살릴 수 없어서 하얀 상아로 살이 없는 부분을 메꾸어 주었습니다. 모든 소동이 일 단락 되자, 제우스는 괘씸한 아들 탄타로스에게 가장 잔혹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죽지 않고 산 채로 타르타로스 한 복판에 쳐 박힌 탄탈로스는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늪에 영원히 갇히고 말았습니다. 머리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이 풍성하게 열려 있어서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손을 뻗으면 곧 닿을 것 같았던 나뭇가지들이 높이 올라가 버려서 과일을 움켜 쥘 수가 없었습니다. 타는 듯한 목마름을 이겨보려고 허리를 굽히면 물의 수위가 밑바닥까지 내려가 물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손으로 물을 움켜쥐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 순간 물이 손바닥 밑으로 다 빠져 내려갔습니다. 영원한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며 죽지 못하고 신들을 능욕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되었습니다.

“탄탈로스의 형벌”이라는 격언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서 에라스뮈스가 살던 시대에는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눌 줄 모르는 고약하고 인색한 부자들을 비꼬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많은 소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누리지 못하고 남에게도 베풀지 않는 어리석은 부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풍요속에 빈곤”(Poverty in abundance)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벌어 쌓아 모으는 재미로 인생을 살아가지만,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목마르고 배고픈 모습으로 가난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탄탈로스의 후예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교부 “성(St.)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는 바실리우스(Basilius Magnus)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탄탈로스의 이야기를 세상의 쾌락과 욕심에 비유했습니다. 많은 열매와 풍족한 물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을 누릴 수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온갖 진귀한 산해진미와 음료들로 가득 찬 잔치(banquet)”를 “판다이시아” (Pandaisia)라고 했는데, 자신은 그 음식들을 바라 볼 수만 있을 뿐 결코 맛 볼 수 없다면, 그 잔치는 고통스러운 저주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많은 돈을 벌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극찬을 합니다. “한 달에 수 백만 불 이상을 번데!”하고 말하면, 그 사람을 영웅 모시듯 합니다. 어쩌면 그는 욕심과 돈 독으로 가득 찬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힘들게 하고 망가뜨릴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을 세상은 우대하고 극찬합니다. 그에게 단 한 번도 커피 한 잔 얻어 먹은 적이 없고, 무슨 신세를 진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작정 그를 향해 대단하다고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 이민사회에도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때 갈퀴로 낙엽 쓸어 모으듯이 긁어 모았다”고 말을 합니다. 과분한 은총으로 많은 돈을 벌었기에 가난한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인종과 세대 간의 벽을 허물고 헌신하는 존경스러운 분들도 있지만, 반대로 많은 부를 가진 것을 인생의 계급장으로 여기는 부끄러운 분들도 있습니다. 정말 존경받아야 할 사람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나누고 베푸는 사람입니다. 큰 커피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커피 한 잔을 사는 사람이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아름답게 돌아갑니다.

그리스의 음유시인(吟遊詩人)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는 자신의 “풍자시집”에서 이 탄탈로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한 마디 꼬집습니다.

“탄탈로스는 목마른 입술에서 달아나는 물 잔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왜, 웃는가? 이름만 바꾸면 바로 그대의 이야기인데…”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