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도 가끔 눈을 감고 있으면 신학생 시절에 라틴어를 배우던 기억이 납니다. 대부분의 고전어들이 그렇지만, 라틴어 역시 복잡한 어미 변화 때문에 매 수업시간마다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어는 딱딱 부러지는 듯한 짧은 경구들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심오한 뜻을 담고 있으면서도 거추장스러운 설명없이 마음 속에 쏙쏙 심겨지는 진리들이 신선했습니다. 당시 라틴어 수업을 가르쳐 주신 분이 가톨릭 교회의 신부님이셨는데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는 아주 엄한 분이셨습니다.
세 시간 수업 중에서 휴식시간 없이 연속적으로 강의를 진행하셨습니다. 언제나 학생들의 불평이 쏟아졌지만, 앞뒤가 꽉 막힌 신부님은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자유롭게 다녀오라”는 말만 남기시고 무표정하게 최후의 1분까지 다 수업에 사용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가르치는 기계”(teaching machine)였습니다. 그때는 그분 모습이 짜증날 정도로 싫었는데, 지금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슴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 어른 덕분에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 학생들이 그나마 세상에 발을 붙일 수 있는 혜안(慧眼)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수업 중에 일독을 권하는 책들을 가끔 소개해 주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종교개혁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의 라틴어 격언집 “아다지아”(Adagia)였습니다.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들, 작가, 정치가, 그리고 많은 문인들의 주옥 같은 라틴어 경구들을 모아 짧은 단상을 덧붙인 책인데, 시대를 초월한 지혜의 보물 창고입니다. 문구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하는 매력적인 책입니다. 그 중에 돋보이는 문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는다”(Letum non omnía fínít)는 경구였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반면에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우리를 건져 줄 마력을 지닌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자살로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한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를 매스컴을 통해 접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시작된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고립감은 수많은 사람들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감당하기 벅찬 고통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진 생명줄을 너무도 쉽게 놓아버립니다.
세상은 최첨단 과학의 발전과 보편화를 통해 고령화의 시대를 열었다고 개가를 부릅니다. 그러나 질병과 근심, 걱정 그리고 경제적인 생활고에 찌든 사람들에게는 늘어난 생명조차 감당하기 힘든 형벌입니다. 몇 달 전에 미국 사회가 떠들썩하게 인질극을 벌였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 주일 뒤에 그를 아들로 둔 노부부가 동반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사무치도록 슬펐습니다. “너무 오래 살았다!” 이 푸념 속에 두 분의 실망과 좌절 그리고 부끄러움이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의무처럼 주어지는 생명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 말에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냐?”하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은 축복받은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분의 다행스러운 세상과는 달리, 살아간다는 것이 충분히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분들로 넘쳐납니다. 어제 길고 긴 항암 요법과 방사선 치료에 지치고 찌들어서 영혼마저 너털너털해진 한 중년의 남자 분을 만났습니다. “목사님, 오늘 밤 아무 고통 없이 저의 생명을 거둬 가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부탁하시는 그 분의 말 속에서 그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의 몸부림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요!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억울함, 분노, 증오심, 부끄러움, 고통과 아픔 등등, 복잡 미묘한 감정과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고통에서 죽음을 통해 자유 함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지혜자들은 언제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Death does not end it all)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줍니다. 죽음에 대해 섬뜩한 생각을 갖게 하는 책이 한권 있습니다. 그 책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죽음의 커튼 뒤로 들어 선 일분 후에, 우리는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던지, 아니면 세상에서는 결코 알지 못하였던 어둠을 처음으로 보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의 미래는 결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당신이 죽은 일 분 후, 어윈 루처). 섬뜩한 문장이 뇌리를 파고 듭니다. 사는 것도 쉽지 않지만, 죽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경고장입니다. 그나마 어떤 모양으로든, 아직 산 자의 땅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기까지 합니다.
성경은 인생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증언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에서 고통의 땀방울을 흘려야 했던 한 강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 23:43).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는 관문입니다. 그 문을 열면 상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이 시작될 것입니다. 너무도 쉬운 말이지만, 깊이 되새겨야 할 묵직한 말입니다.
사람이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세 가지 명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영혼불멸 그리고 심판입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사멸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기에 함부로 끝을 내서는 안됩니다. 생(生)은 하나님의 명령(命)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쉼표를 함부로 마침표로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힘들어도 용기를 내서 마지막 순간까지 명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다음 삶을 멋지게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Letum non omnía fínít).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