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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uarary 24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어떤 목사님이 “삭개오”(Zacchaeus)에 관한 설교를 하시다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읽었던 “니고데모”(Nicodemus)의 이름과 삭개오의 이름을 혼동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세리였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몹시 보고 싶어했습니다.” 설교를 듣고 있던 성도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아니라 삭개오 아냐?” 목사님은 교인들이 수군거리자 설교가 은혜로워서 그런 줄 알고 더 큰 목소리로 힘있게 설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니고데모가 살고 있던 여리고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보고싶어 무리들 사이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키가 작아 뽕나무 위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설교가 이쯤 되자, 성도들이 “까르르”하고 웃어버렸습니다. 그제서야 목사님은 자신이 계속해서 실수하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황스럽고 얼굴도 화끈거렸지만, 그렇다고, “아이구 제가 실수했네요. 니고데모가 아니라 삭개오 입니다”하고 바로잡기에는 너무 많이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기발한 재치를 발휘했습니다. “니고데모가 뽕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무 밑에 있던,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삭개오가 나타나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야! 니고데모, 너 빨리 안 내려와? 그 자리는 내 자리야!” 그러자 성도들이 웃느라고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목사님의 재치와 위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뽕나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역시 삭개오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옛날 성경에는 “뽕나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좀 더 정확하게 “돌무화과 나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삭개오 만큼이나 작은 그 나무는 삭개오가 얼마나 치열하고 열정적인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나무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는데 사활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라는 지역에 살고 있던 세리였습니다. 그는 세관 전체를 책임지는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키가 유난히 작고, 몸도 왜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던 날,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삭개오는 근처에 있던 한 나무 위로 악착같이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한 눈에 보여 주는 대표적인 단면입니다. 오늘 날, 많은 책들이 삭개오를 “난쟁이”(Dwarf)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한국도 그랬지만, 당시 삭개오가 살던 시대에도 뭔가 부족해 보이고, 연약해 보이면, 무시당하고 따돌림당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자기가 뭔가 부족하고 꿀린다고 생각되면” 대부분 사람들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군중들 틈바구니에서 떠밀려 나가게 되자, 그는 포기하지 않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강하고 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 같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밀어내는 더러운 세상이 싫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을 깔아 뭉개고 짓밟아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자신의 모습을 대신해 줄 수 있는 큰 나무를 찾았습니다. 그 나무 위에 올라서면 아무도 자기를 깔보거나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다! 이 놈들, 내가 누구인지 한번 똑똑히 보여주마!” 삭개오가 선택한 큰 나무는 바로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나무 위에 올라서서 떵떵거리며 망가진 자신의 인생을 보상 받고 싶었습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멸시한 사람들을 짓밟아 버리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는 로마의 충실한 세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거둬다가 로마제국에 바치는 “매국노”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동족들의 고혈을 짜내면서 무자비하게 세금을 거둬들여 중간에서 떼어먹고, 로마의 관료들에게 아부, 아첨하면서 세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내심 통쾌했을 것입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삭개오를 우습게 볼 수 없었습니다. 비록 뒤에서는 손가락질을 하고 욕을 하더라도, 그의 앞에서는 “나의 사정 좀 봐 달라”고 설설 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이 힘든 세상에서 강해져야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뼈 속 깊이 되새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게도 인생이 공허 해졌습니다. 사는 것이 무의미 해졌습니다. 풍족하게 살면서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깊은 외로움이 엄습했습니다. 고뇌 속에 살아가던 어느 날, 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자기가 사는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유대 전역과 인근 지역의 사람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가 많은 선지자이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무엇보다도 자기 같은 속물들을 내치시지 않고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소문을 누누이 들어왔습니다.

그런 고귀한 분이 누추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삭개오는 예수님을 꼭 만나뵙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8절 말씀에 보면,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도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꼭 만나보고 싶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도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분이셨으니, 일반 대중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말 그대로 예수님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보고 싶어하는 “슈퍼 스타”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리고로 꾸역꾸역 모여들었고, 길목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삭개오가 들어설 공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삭개오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근의 돌무화과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만큼 삭개오가 간절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평생을 따돌림과 짓눌림 속에서 살아온 사람의 간절한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그날, 삭개오는 자신의 소망대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삭개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은 “강한 자”, “성공한 자들”에게만 눈길을 주고, 관심을 가져 주는데, 예수님은 처음부터 다른 분이셨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다른 눈길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서 당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 중년의 남자를 보셨습니다. 아니, 그의 외로움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셔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누가 19:5) 정춘수 님의 시(詩)가 생각나는 구절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신 그 순간, 이미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사랑의 눈길로 부르셨고,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새 사람이 되었고, 평생 자기를 지배했던 재물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서약했습니다. “주님, 저의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주겠습니다. 만약, 함부로 남의 것을 강탈한 것이 있다면, 율법이 규정한 것 이상으로 갚겠습니다.” 감동하신 예수님께서도 삭개오에게 이렇게 화답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삭개오는 스스로에 대해 “자신은 결코 무대 중앙에 설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삭개오를 무대의 중앙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려고 삭개오와 같이 나무 위를 기어오릅니다. 그분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