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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6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Belli Casus Veritas Prima (전쟁의 첫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Peace)를 갈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단 한 번도 전쟁이 멈추었던 시절이 없습니다.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끊임없이 전쟁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마치 화로 불 속에 작은 불씨가 남아 있어서 언제든지 “호호” 불면 다시 타오르는 것처럼, 전쟁의 불길은 한번도 꺼지지 않고 그 불씨를 이 세상 어딘가에 간직해 왔습니다. 어떤 때는 국가 간의 전쟁 양상으로, 또 어떤 때는 한 국가 안의 내전(內戰)의 모양으로,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노사(勞使)간의 갈등 내지는 학원 민주화 투쟁 같은 작은 불씨로 산재되어 명목을 유지해 왔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마치 투쟁의 역사인 것처럼 끊임없이 다투고 분쟁해왔습니다. 거창하게 전쟁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전쟁에 친화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지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그 증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부부 간의 싸움,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형제와 친척 간의 반목과 질시, 그리고 이웃과의 분쟁도 우리가 근본적으로 평화와는 거리가 먼 존재인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평화를 추구해 왔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전쟁이나 싸움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언제나 “정의”를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진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전쟁의 결과도 고귀하거나 아름다웠던 적이 없습니다. 추하고, 더럽고, 악하기 그지없는 것이 바로 전쟁의 “민낯”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십자군 전쟁”(Expeditio Sacra)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유럽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교도들의 간헐적이면서도 지속적이었던 전쟁입니다.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자신들의 옷이나 장식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 넣고, “하나님이 전쟁을 원하신다”(Deus vult)라는 대의명분 아래 빼앗긴 성지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사명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거룩한 의도와는 달리, 시간이 가면서 십자군 전쟁을 통해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은 살인, 강간, 도둑질, 방화 그리고 여러가지 얼굴의 추악한 범죄들(Crimes) 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추악해지고 잔인해 질 수 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 소위 “성전”(聖典)이라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십자군 전쟁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 마치 학교 동요처럼 듣고, 부르며 자란 노래가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와 파병의 노래인 “맹호부대 용사들”입니다. 어렸을 때는 이 분들이 전쟁으로 고생하는 베트남 국민들을 지키고 베트콩 악당들을 쳐부수러 가신 정의의 사도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분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희생과 헌신 덕분에 월남전이 잘 끝나고 평화가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미국에 유학을 와서 공부를 하며 배우게 된 진실은 부끄럽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우리의 김상사와 용감한 맹호부대 용사들이 저지른 만행은 실로 기가 막힌 것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함께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외국의 병사들도 무서워 떨 정도로 잔인하고 악랄했습니다. 선량한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하고, 마을의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하고,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이고 훼손해서 철조망이나 장대 위에 시신의 일부를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미국 교수들이 슬라이드로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면서, 한국 유학생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았느냐?”고 질문할 때,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몰랐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김상사 아저씨와 맹호부대 형님들도 가슴 아픈 피해자이기는 매 한 가지였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 죄책감과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쟁의 본질입니다. 전쟁에는 결코 성전(聖典) 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럽고, 비 인간화된 학살 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한국의 6·25전쟁,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르기까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전쟁은 그 어느 것도 참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것이 바로 ‘진실’(veritas)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비극 작가였던 “아이스킬로스”(Aeschylus)가 한 말입니다. 페르시아에서 일어났던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해서 처참한 죽음들을 직접 눈으로 목도한 아이스킬로스가 비극 작가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숭고한 이념과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시작한 전투였는지 몰라도 나중에는 “왜,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지?” 그 진실 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전쟁을 주도했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전쟁을 왜곡하는 작업을 합니다. 다시 한번 국민들을 말도 되지 않는 명분을 내세워 기만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의 원래 목적이었던 패권을 잡고,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고,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던 속내를 철저하게 숨깁니다. 그들의 과장된 미사여구와 현혹하는 말들 때문에 대중은 언제나 둘로 나누어지고,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다시 한번 다투고 분쟁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던 사람들조차 생각의 끈을 놓고, 양대 진영의 지도자들에게 붙어서 “싸움을 위한 싸움”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왜 전투를 벌였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단지 자신들이 선택한 간악한 지도자들의 이데올로기만 신봉하고 따를 뿐입니다. 전쟁이 끝나도 진실은 온데 간데 없고, 다만 승자의 해석과 역사 왜곡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전쟁의 답답한 참상입니다. 오늘 날에도 계속 반복되는 싸움의 도식(圖式)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신라”가 전쟁에서 이겨 삼국을 통일한 후에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날조하고 왜곡했습니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지도층의 분열 때문에 멸망했고, 백제는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거느리며 향락과 타락을 일삼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라가 당나라라는 강력한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통일 신라의 왜곡된 해석을 그대로 답습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줍니다. 그렇게 되면 그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때문에 많은 지성인들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고, 잘못되었던 과거사를 청산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요즘 한국에서 절찬리에 상영중인 영화 “서울의 봄”을 관람했습니다. 역사적인 인물들을 최대한 잘 묘사하면서도 영화의 극적인 효과를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전두광으로 등장하는 배우 황정민과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분장한 배우 정우성의 연기가 단연 압권이었습니다.

전쟁의 본질이 그런 것처럼, 두 사람을 중심으로 그들 옆에 수많은 장성들이 포진하면서 전투는 두 진영으로 극명하게 나누어졌습니다. 두 진영 모두 겉으로는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들의 속 마음을 간파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들의 몫입니다. 충신이라고 알려진 이태신 장군이 패배하면서 영화가 끝나는 것이 다소 암울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나마 위안을 얻는 것은 실제의 역사 속에서 만큼은 이태신 장군으로 열연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만이 아직까지 살아남아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고, 서울의 봄과 같은 영화를 통해 악인들을 고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진리”가 왜곡되고, 사장되는 비극이 없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것이 로마의 압제 하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하시려고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에 강림하신 아기 예수님의 뜻이 아닐까요?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