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칼럼 목록가기

December 11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De Nihilo Nihilum (무無에서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대강절(Advent)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은 성탄절이 되기 4주 전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이브까지 지켜지는 절기입니다. 이 대강절부터 “교회력”(Church Calendar)이 시작됩니다. 교회의 모든 절기가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대강절(待降節)이라는 말은 “기다릴 대”, “내릴 강” 그리고 “마디 절”자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 땅에 강림하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성탄절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맞이하려면 먼저 이 대강절을 잘 지켜야 합니다. 자기 비움과 성찰의 마음으로 잘 준비된 대강절을 보내야만 아기 예수님 탄생의 기쁨과 감동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대강절을 말 그대로 “대강 대강” 보내는 사람은 절대로 성탄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대강절을 맞으면서 설교제목을 “누가 아기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했는가?”(Who made baby Jesus born in a stable?)라고 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무관심과 무책임한 모습이 결국 우리의 구주이신 아기 예수님을 마구간이라는 초라한 곳에서 태어나시게 만들었다는 자각과 반성이 담긴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가지 변명과 핑계를 대며 젊은 임산부 마리아와 무력한 남편 요셉을 외면했을 때, 아기 예수님은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성탄절을 단지 즐겁고 화려한 교회의 명절로만 인식하고, 그 속 뜻을 외면해 버린다면, 결국에는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자성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교회는 주일 날, 주보를 발행해서 예배의 순서를 알려줍니다. 먼저 “다음 순서”가 무엇인지를 기록하고, 그 옆 칸 중앙에 “설교 제목”을 적습니다. 그리고 줄 맨 나중에 그 설교를 하는 사람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주보를 만들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예배시간에 강단에서 주보를 들여다 보다가 갑자기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주보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설교말씀 -----“누가 아기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했는가?”----- 김세환 목사

김세환 목사가 아기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태어나도록 무책임하게 외면하고 방조해 버린 주범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탄을 “성탄 답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딱한 사람이 목사일지도 모릅니다. 성탄절이 되면 유독 많아지는 행사와 사무 처리들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가야 할 곳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게다가 매년 되풀이 되는 정해진 설교 본문 속에서 참신하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뽑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메마른 감성을 갖게 됩니다. 목사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다 시간과 마음을 정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해마다 맞이하는 성탄절은 단순히 묵은 해에서 또 다른 새해로 넘어가는 경계선 상에 서 있는 너무도 뻔한 시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대강절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자기를 비우고,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성탄절은 이미 대강절에 시작됩니다.

어찌 보면, 성경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해와 설득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려고 하면 신앙인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으려는 마음을 정하지 않으면 좀처럼 성경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세시대 캔터베리의 대 주교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강조했습니다. 이성적인 논리보다는 먼저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나는 믿기 위하여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해보다도 믿음을 먼저 선행한 것입니다. 히포(Hippo)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도 “여러분이 믿는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crede, ut intelligas)라는 말을 해서 같은 입장을 취했습니다.

“신앙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는 성경을 펴고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으로 판가름이 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믿으면 계속 성경을 읽어가게 될 것이고, 거부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성경을 덮게 될 것입니다. 중세 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creatio ex nihilo)는 말을 거부하고,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De nihilo nihilum)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의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De nihilo nihilum”이라는 말은 중세시대에 더 이상 성경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선언이기도 하고, 신앙과 불신을 나누는 갈림길이기도 했습니다.

이성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은 말 그대로 허구(虛構)의 연속입니다. 실존했던 장소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해서, 지팡이 하나로 바다를 가르고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건너간 이야기, 인류 최초의 철옹성인 여리고 성을 촌 사람들이 양각나팔을 불며 멀찍이서 일주일 동안 13바퀴를 돌았더니 알아서 저절로 무너졌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편들어 주시니 해가 떨어지지 않고 계속 낮이 되어 전투에서 이겼다는 이야기,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 했더니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았다는 이야기 등등,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들을 구약성경 내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구약성경 뒷부분으로 갈수록 황당한 이야기들이 줄어들어 견딜 만 했는데, 갑자기 믿었던 신약 성경마저 뒤통수를 칩니다. 마태복음 첫 장부터 황당한 이야기의 극치를 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Cur Deus Homo).

“무한한 질적인 차이”(Unendliche qualitative Unterschied)를 가지신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처녀 아이의 몸을 빌어 비천한 마구간의 여물통 속으로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런 황당한 방법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어쩌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아니면 접어야 할지를 결단하게 만드는 분수령이 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부족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사랑의 눈으로 읽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머리의 용어로 읽으면 대략난감(大略難堪)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으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사랑이라(God is Love)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해 이성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수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충분히 바보가 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정점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성탄절”입니다. 당신이 외아들을 그렇게 비천한 곳까지 강림시키실 만큼 우리를 오롯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무에서 유”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번 대강절 기간에는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마음보다는 넓은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을 깊이 느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