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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30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Lingua Amicus (말로만 친구)

대화를 할 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인 것 같은데, 막상 행동으로 옮겨야 할 순간이 되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며 취기가 오를 때는 금방 간(肝)이라도 빼어 줄 것처럼 호들갑을 떨다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하거나 위기상황이 오게되면 뒤돌아서서 주판알을 튕기며 손익을 계산하다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친구들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친구도 아닙니다. 그냥 얍삽한 인간들일 뿐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불가(佛家)에서 사용하는 말이지만, 그 뜻을 곱씹어 보면 많은 깨달음을 주는 말입니다. “무엇을 줄 때는 보상심리를 가지고 다시 받을 생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더욱 더 주고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 친구와 재물을 모두 다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종교개혁시대의 에라스뮈스가 쓴 “아다지아”(Adagia)에는 친구 간의 우정(Philia)에 대한 특징이 언급되어 있는데, 우정의 기본 전제 조건은 순수함과 진실함 그리고 불변성 임을 강조합니다.

말로만 친구(Lingua Amicus)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리는 술자리입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이 미국의 이민사회에서도 술 문화는 성인 어른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친교와 단합의 수단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덕분에 각종 회식 자리나 친교 모임 그리고 연말행사 때가 되면 늦은 시간까지 술 자리를 마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오고 가는 말을 들어보면 정말 가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의리와 정의의 용사들이 다 그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술을 마시기 전에 함께 뜻을 다지고, 마음을 합치는 건배사(Toast Talk)들을 외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사뭇 비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톡을 하는 사람이 잔을 높이 들고 “우리 죽을 때까지 같이 가자” 하면서 운을 띄운 후에, 먼저 “우리는”이라는 선창을 하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잔을 들고 한 목소리로 후창을 합니다. “하나다!”를 외치면서 부어라 마셔라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건배사를 하는데, 별의별 재미있는 기발한 말들이 난무합니다.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미사일”(미래를 위해, 사랑을 위해, 일을 위해), “모바일”(모든 일들이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위하여), “오바마”(오빠가 바라다 줄께 마시자),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끈끈끈”(업무는 매끈하게, 술은 화끈하게, 우정은 끈끈하게), 그리고 “변사또”(변함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같은 간지로운 말들을 외치며 술잔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정말 하나가 될까요? 그러다가 건강을 상해서 중병이라도 들게 되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외면합니다. 회사나 단체에 큰 도움이 안되면 조용히 없애 버립니다. 그래서 “술 친구는 친구도 아닙니다.” 진정한 친구는 힘들고 어려울 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능력과 재물과 명예와 권력 있으면 끈끈하게 붙잡고, 조금만 뜻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먼지까지 싹싹 털어버리는 것이 세상의 인심입니다. 세상에서 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죤 덴버(John Denver)는 미국의 대표적인 싱어송라이터이면서 동시에 음악 프로듀서였습니다. 그는 1974년에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 “애니 마르텔 덴버”(Annie Martell Denver)를 위해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애니송”(Annie’s Song)이라는 사랑의 송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당시 많은 대중들은 감미로운 그의 노래에 매혹되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까지 세상에서 만들어진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죤 덴버는 이 노래를 부른 후 몇달 지나지 않아 그녀와 결별을 했습니다. 그렇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난리를 치다가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싫증이 나게 되면, 금방 내버리는 것이 세상의 사랑 방법입니다.

격언집 “아다지아”에는 “말로만 친구”(Lingua Amicus)라는 격언이 있지만, 반대로 “사시사철 친구”(Omnium Horarum Homo)라는 말도 있습니다. 기쁜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고 함께 동행하는 친구를 말합니다. 항상 편안함을 제공하고, 상황에 맞게 엄숙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함께 슬픔도 나눌 수 있는 친구입니다. 자기에게 이득이 될 때는 아부하고 아첨하면서 옆에 딱 붙어 있다가 개인의 욕심에 휘둘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그런 파렴치한 인간들과는 질이 다릅니다. “사시사철 친구”를 가진 사람은 이미 그 자체로 축복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며 평생을 함께 지냈던 원로 장로님 두 분이 계셨습니다. 교회에서는 직분이 직분인지라 근엄하기도 하고, 말수도 별로 없으셨지만, 두 분이 자기들끼리 만 있게 되면 영락없는 개구장이 철부지 시절로 돌아가셨습니다. 뭐가 그리도 좋으신지 둘이만 붙어 있으면 항상 속닥속닥하시고, 희희낙락하셨습니다. 두 분이 그렇게 지내시는 바람에 두 분의 아내 되시는 권사님들도 자연스럽게 절친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장로님이라는 분이 간암에 걸리셨습니다. 이제 막 여든 살이 되셨는데, 병원에서는 무리해서 수술하고 고생하시기 보다는 남은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시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삼형제 아들들과 온 가족들도 복잡하게 장기 기증자를 찾고 수술하시느라고 고통을 받는 것 보다는 의사의 권유를 듣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분신처럼 지내셨던 김 장로님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당신의 간(肝) 절반을 이 장로님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이제 살만큼 산 늙은이들이니, 설사 잘못된다 해도 부담되지도 않고, 그냥 우리들끼리 서로 조금만 더 같이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 때문에 결국 간 이식 수술을 하셨습니다. 두 분은 정말 몇년 더 동화처럼 사시다가 두 달 차이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셨습니다. 연인보다 더 연인 같고, 형제보다 더 형제같은 두 분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교우들이 “과연 우정이 무엇인지?”를 깊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오늘 날의 사람들의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두 분이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잠언”에는 친구에 관한 주옥 같은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17:17),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18:24),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19:6),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찌니라”(20:19),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라”(22:24),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27:9), 그리고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27:17) 구구절질이 옳은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구는 또 다른 나(我)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친구들을 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가끔, 저의 주변을 둘러보며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결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도 있고, 함께 있어 주어서 고마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인데 너무 쉽게 “등”을 내어주는 친구들이 있고, 특별한 의미를 두고 만나지 않았는데 끝까지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너무도 가벼운 어른 벗이 있고, 묵직한 어린 벗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벗(友)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