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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3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Talpa Coecior (두더지 보다 눈이 어둡다)

옛 사람들은 두더지가 눈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더지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땅 속에서 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두더지는 땅 속에 사는 나비의 유충, 지렁이, 민달팽이, 풍뎅이 그리고 지네 같은 것들을 먹으면서 살기 때문에 땅 밖으로 나올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어쩌다 잡히는 두더지들을 보면 참 생긴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주둥이는 길쭉하게 튀어나왔고, 콧구멍이 두개 크게 뚫려 있습니다.

목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고, 후각과 청각이 발달해서 작은 소리나 미세한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거대한 양 발은 마치 평생 땅을 파기로 작정한 것처럼 굴착기를 닮았습니다. 그런데 눈이 없습니다. 햇빛을 볼 이유가 없어서 인지 눈이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두더지가 눈이 없어서 앞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두더지는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작아서 살 속에 파묻혀 있는 것뿐입니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두더지에 관한 비유를 자주 사용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소중한 것 임에도 불구하고 잘 보지 못할 때, “두더지 보다도 눈이 어둡다”(Be more blind than a mole)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너무도 귀한 것인데 하찮은 것처럼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요즘에는 “평화”(Peace)라는 말이 가장 절실하게 피부에 와닿습니다. 매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서 매일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그리고 얼마 전에 일어난 “이스라엘과 가자지구(Gaza Strip)의 정당 테러단체 하마스(Hamas)” 간의 전쟁으로 인해 온 세상이 살얼음 판처럼 얼어버렸습니다. 수많은 폭격과 포화 속에서 어제까지 볼 만했던 세상이 검은 폐허의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화마(火魔) 속에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모습을 연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세상은 “평화”라는 단어를 새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편리함 속에서 이제 세상은 하나님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처럼 오만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고,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으로 인해서 서로 쉽게 연결되었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분쟁하고 다툴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힘 만으로 세상을 잘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터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과 한 동안 잠잠했다가 다시 고개를 쳐든 전쟁의 소식들은 우리가 그동안 너무도 쉽게 간과해 버렸던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

며칠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송두리째 모두 잃어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어떤 이스라엘의 중년 남성과 똑같은 절망의 상황을 그대로 답습한 한 젊은 팔레스타인 남성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울부짖으며 절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알라 신께” 서로 간구하는 대상은 달랐지만, 그들이 구하는 내용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평화!”, 평화였습니다. 그 동안 상호 간의 여러가지 부족과 불편으로 인해서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막상 전쟁과 테러로 인해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되자, 그들은 오직 “평화” 하나 만을 간절히 구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성자”(Saint)라고 불리던 “아시시의 프란시스”(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가 평화의 사도라고 불리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저녁, 프랜시스가 자기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한 나병환자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자기가 너무 추워서 고통스러우니 잠깐 동안만 방에서 몸을 녹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프랜시스는 그의 손을 붙잡아 방 안의 난로가로 안내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나병환자는 “배가 너무 고파서 견딜 수가 없으니, 혹시 집에 남은 빵이 있으면,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프랜시스가 저녁에 먹다 남은 빵을 이 나병환자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개 눈 감추듯이 허겁지겁 마른 빵을 단숨에 다 먹어 치웠습니다.

그리고는 한 수 더 떠서 “자기가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면 안되겠느냐?”고 불쌍한 표정으로 간청을 했습니다. 프랜시스가 흔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 속으로 들어가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추운 날씨에 밖에서 오랫동안 떨었기 때문인지 이 나병환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며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너무 급하게 먹은 빵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자칫하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습니다. 프랜시스는 급하게 겉옷을 벗고 알몸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그의 차디찬 몸을 꼭 껴안습니다. 그의 몸이 꽁꽁 얼어붙은 얼음장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견디다 눈을 떠보니 어느 덧 아침이 되었습니다. 프랜시스가 그만 그 나병환자와 체온을 나누다가 잠이 들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어야 할 나병환자가 없었습니다. 침대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놀랍게도 간 밤에 아무도 집 안에 들어온 흔적이 없었습니다. 프랜시스는 밖으로 나가 “혹시, 아침에 누가 자기 집에서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고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이른 아침부터 프랜시스의 집 앞에서 일을 했는데,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프랜시스는 눈이 열려 간 밤에 자신을 찾아 온 분이 누구인지를 비로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부족하고 모자란 저를 왜 이토록 사랑하셔서 누추한 곳까지 방문해 주셨습니까?” 프랜시스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만나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가 그 날 아침 드렸던 기도문이 바로 그 유명한 <평화의 기도> 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그는 평생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고, 자신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고 보살피며 살았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인플레이션의 위기, 코로나바이러스의 후유증, 그리고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꽁꽁 얼어 붙어 가고 있습니다. 두더지 보다도 어두운 눈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소중한 가치들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평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