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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16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Credo Quia Absurdum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한 농부가 언덕 너머에 있는 밭을 일구기 위해 큰 황소를 끌고 재를 넘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유독 아침부터 찌는듯한 무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람 한 점 없었습니다. 황소도 더운 날씨에 짜증이 났는지 농땡이를 피우며 좀처럼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황소의 고삐를 바투쥐고 짜증스럽게 당기면서 언덕을 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새들이 그 모습을 비웃듯이 농부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조금만 합리적인 분이시라면, 저렇게 작은 새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실 것이 아니라, 이렇게 큰 황소에게 날개를 달아 주셨을 텐데!” 농부는 볼멘소리로 푸념을 했습니다. 황소가 하늘에서 가볍게 날개를 젓고, 자기는 밑에서 황소의 코에 코뚜레한 줄만 당기면서 끌고가면 아주 편안하게 이 언덕을 넘을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이 자기보다 생각이 짧으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농부의 머리 위를 날던 새 한 마리가 갑자기 똥을 쌌는데, 하필이면 농부의 머리 위에 떨어졌습니다. 농부는 새똥을 닦아 내면서 조금전에 했던 하나님에 대한 불경한 생각을 회개했습니다. 만약 푸짐한 황소의 똥이 농부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면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합리적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사람은 종종 살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도 좀처럼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약 2세기 경에 기독교 초기 역사 속에서 신앙의 진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한 교부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아직 기독교의 정통 교리들이 수립되지 않았던 때에 교회 안에 몰아 닥친 영지주의(Gnosticism) 같은 이단사상과 논리들 그리고 반(反) 기독교적인 그리스, 로마 철학에 맞서서 싸운 신앙의 교부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기독교 핵심 교리들의 문을 연 선구자입니다. 그가 바로 카르타고(Carthago)의 교부 “터툴리안”(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입니다.

그는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하고, 법조인이 된 완고한 성품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가 금하는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서슴없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사건이 그를 기독교 세계에 발을 딛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인생 말년에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열정 때문에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퍼져 나갔던 “몬타누스 주의”(Montanism) 성령 운동에 몰두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교회 교리의 핵심 골격을 이루는 “삼위일체”(Trinity)에 관한 교리와 다른 정통교리들을 사수하고, 정통 신앙의 골격을 만들어가는데 큰 공헌을 한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영지주의의 핵심 인물이었던 마르키온(Marcion of Sinope)을 논박하고 단죄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기독론의 명확한 기준을 세운 인물입니다.

법률을 공부한 터툴리안은 누구보다도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사람이었지만, 반대로 엄격하고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한번 옳다고 믿으면, 결코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훗날, “장 피에르”(Jean-Pierre) 같은 신학자들에게 “진리에 미친 사람”이라는 조롱을 받을 정도로 터툴리안은 극단적인 뜨거운 열정의 사람이었고, 그 기질이 그를 몬타누스 성령운동에 빠져드는 오류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터툴리안은 너무도 유명한 두 가지 말을 했는데, 첫째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는 그리스·로마 철학의 합리적인 사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거부하면서 신앙을 논리와 학문의 영역이 아닌 실존적인 삶과 순교의 영역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결코 신앙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도 못한 교회의 감독권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면서,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로부터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소위 “감독들”이라는 작자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라”라는 비판적인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터툴리안은 너무도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나는 불합리하기에 믿는다”(I believe because it is absurd)였습니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반(反) 지성주의적인 느낌을 줍니다.

“합리적이면 안 믿고, 불합리하면 믿는다”는 것 같은 주장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렇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불합리한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신앙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다.” 이 말의 출처는 터툴리안이 쓴 “그리스도의 육신론”(De Carne Christi)인데, 이 책에서 그는 마르키온의 주장, 곧 “천상에 있는 완전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더럽고 불완전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하셨다는 주장은 결코 믿을 수 없는 황당한 괴변이라”는 말을 강하게 반박하였습니다. 오히려 터툴리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온 진정한 하나님이셨기에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십자가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추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에 더 믿을 만한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합리적인 것만 믿음의 대상으로 다루지만, 하나님은 불합리한 것도 충분히 다루실 수 있는 분이기에, “오히려 불완전한 것이 더 믿을 만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후손인 현대인들은 누구나 이성(理性)의 신봉자들입니다. 합리적이고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좀처럼 믿으려고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반복적인 재생을 통해서 사실을 입증하려고 하고, 논리를 벗어나게 되면 일단은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로 냉소적인 눈길을 보냅니다. 덕분에 아무리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좀처럼 비 이성적인 말이나 행동을 내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터툴리안의 주장처럼 비합리적이고 신앙 외에는 입증할 방법이 없기에 그래서 더 믿음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청년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사경을 헤맸습니다. 뇌수술을 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출혈이 되는 바람에 고통스러운 재수술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며칠 뒤에는 혼수상태 속에서 심정지가 여러차례 반복되었습니다. 마침내 주치의사는 환자의 가족들에게 임종을 준비하라는 무거운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가족들은 저에게 병상세례를 부탁했고, 저는 동료 목사와 함께 중환자실(ICU)에 들어가 재빠르게 세례식을 집례했습니다. 이미 허옇게 뒤집을 눈동자와 길게 내민 혀는 그가 어쩌면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에”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할 수밖에 없었고, 저는 용기를 내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불합리하게도” 그는 몇 주 후, 다시 회복되어서 지난 주일 예배를 성도들과 함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불합리한 영역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의 고백은 저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습니다”(Credo quia absurdum est).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