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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7

삶을 반추하는 작은 생각들


다시 새롭게

2024년도 새해가 밝았습니다. 시간에 새해가 어디 있고, 헌 해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간은 언제나 똑같이 새롭고 소중합니다. 인생은 괘종시계처럼 몇 바퀴 돌면서 이미 경험했던 시간을 다시 되풀이 할 수 있는 여정이 아닙니다. 인생 시계는 원형이 아니라 일직선입니다. 한번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직 종착역이 보이지는 않지만 계속 달음박질치다가 탈진해서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멈추어 선 그 자리가 결국에는 인생의 끝입니다. 인생은 일회적인 긴 직선 레이스입니다. 매 시간, 매 분, 매 순간이 처음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들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작은 분량의 시간이라고 해서 마치 없어도 되는 양, 가볍게 떼어내 버릴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의술이 좋아졌다고 해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명(命)이 있습니다. 그 시간이 다하면 결국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자기에게 부여된 시간을 다 사용하게 되면 결국 죽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전에 비해 오래 사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든”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생은 마치 작은 시간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모자이크 판과 같습니다. 허투루 버릴 수 있는 시간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앞에 일직선으로 놓여 있는 시간의 어느 한 경점(更點)에 선을 그어 “헌 시간”과 “새 시간”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헌 시간 쪽에서 새 시간 쪽으로 건너 뛰면서 “이제 자신은 헌 시간과 작별을 했고, 새 시간에 속했다”고 자리매김을 합니다. 과거는 지나 갔고 이제는 새로운 시간에 속해 있다고 “선 긋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살게 되었으니, 새로운 모습으로 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격려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리석게 보이지만, 상당히 지혜롭고 현명한 “인생 관리법”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 보고 심기일전해서 다시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이며 “결단”입니다. 시간과 함께 지내온 아픈 기억이나 상처를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용기 있는 몸짓입니다. 힘들었던 과거의 시간과 단절하고 인생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는 기발한 발상입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교회에서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립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좋았던 시간들도 잊어버리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도 털어버리려고 합니다. 좋았던 순간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교만해지고, 반대로, 힘들었던 시간에 붙잡히게 되면 생각이나 행동이 움츠려 들고 비겁해집니다. 옛 것을 다 보내고, 새 것을 맞아들여야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1636년 12월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세력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청나라(후금)에 밀려 남한산성에 고립됩니다. 천자(天子)의 나라인 명나라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어 줄 것처럼 굽실거렸는데, 청나라에게 만큼은 “오랑캐”, “떼놈”이라고 낮잡아 평가하더니 결국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인조는 피난처 남한산성에서 한강 나루터 “삼전도”로 나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청나라 오랑캐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꽁꽁 얼어 붙은 동토의 땅 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짖지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게 됩니다. 용서를 구하고 신하의 예를 취한 것입니다. 1637년 1월 30일에 이루어진 소위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청은 물러갔지만, 조선은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 많은 조공물들과 60만명의 노예들을 보내게 됩니다. 60만명 중에 50만명이 가엾은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물설고 낯설은 이방인들의 땅에서 어떻게 고통을 받고, 성착취를 당했을 지는 말하지 않아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운 좋게 착한 사람을 만나 청국 시민으로 귀화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어린 나이에 정조와 절개를 잃고 몸과 마음이 마음껏 유린당하다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쓸모없게 되자 고향 조선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환향녀”(還鄕女)들입니다.

자기 몸 하나도 버거웠을 터인데 그녀들의 등에는 무거운 짐 보따리가 짊어 지워 있었고, 양 손에는 청나라에서 낳은 아들과 딸들의 손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분명히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비통한 피해자들이었는데, 오히려 나라는 그녀들을 행실이 아주 나쁜 “화냥년”들이라고 매도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들도 많았지만, 이미 강해지고 모질게 된 여인들은 자신들만 바라보는 어린 것들을 위해 반드시 살아야만 했습니다. 환향녀가 낳은 자녀들을 사람들은 “호로자식” 또는 “후레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날에는 “배운 것없이 막 자란 예의 범절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아비 없이 “홀로” 태어나 자란 자녀들에게 붙여진 치욕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아마도 이들의 존재가 눈엣가시 같았을 것입니다. 힘없는 나라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칙령을 내려 정월 보름날에 한양 도성 북쪽 홍제천에 나와 몸을 깨끗이 씻고 돌아오면 그간의 모든 허물이 다 사하여 질 것이라는 기발한 발표를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런다고 지난 치욕이 없어지냐?”고 비아냥거렸겠지만, 그래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가엾은 여인들의 입장에서는 그 의식이 힘든 숨을 다잡을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홍제천에서의 목욕은 망가진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재활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에 아주 친하게 지내던 누나가 있었습니다. 참, 귀엽고 예쁘게 생겼는데 유독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좋다고 접근하는 남자들이 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다 시집을 가서 아기들까지 낳았는데, 이 누나만 딱하게도 혼자였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교회 어른들은 이 누나에게 “묵은 닭”이라는 짜증나는 별명까지 붙여주었습니다. 노래도 잘 부르고, 상냥하고, 재능도 많았는데 늦게까지 결혼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누나에게 애인이 생겼습니다. 훤칠한 키에 꽃미남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잘 생긴 백마 탄 왕자였습니다. 성품도 좋고, 신앙도 좋고,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멋진 청년이었습니다. 그 누나의 입이 항상 귀에 걸려 있었습니다. 사랑을 해서 인지 더욱 예뻐 보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자 사람들은 그녀를 “새댁”이라고 불렀습니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 묵은 닭이었으니, “묵은 댁”이나 “헌 댁”으로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새댁”으로 호칭이 바뀐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서 한 남자의 아내로 새롭게 출발했기 때문에 새댁이 된 것입니다. 그녀의 소속이 새롭게 바뀐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을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사람들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옛 구습을 좇아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좇아 새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공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인생 삼적(三敵)”이 있다고 합니다. 쉽게 결정하지 못해서 “허우적”, 결정하고도 시작하지 못해서 “뭉그적”, 그리고, 시작한 후에도 자꾸 뒤돌아보느라고 “흐느적”…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털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때입니다.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 아틀란타 소명교회 김세환 목사